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떠졌다. 숙소 메이트들이 곤히 자고 있는 탓에 가방을 뒤적거리기 어려워 조용히 2층 침대로 올라갔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택시로 배낭을 보내는 날이라 수월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택시가 오기로 한 시간은 8시. 혹시나 엇갈리게 될까 불안해져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나 자신이 멋없다고 느껴졌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배낭을 메고 제 발로 완주를 하는데 나만 내 몸이 다칠까 두려워 도전을 피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가방이 무겁다는 이유, 동키가 없다는 이유 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편하게 완주를 하고자 하는 내 오랜 버릇이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것 같아 우울해졌다. 요즘 새벽에 깨서 홀로 멍하니 있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떠돈다. 길을 걸을 때도 부정적인 생각뿐이다. 생각을 비우고자 떠난 여행인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 팜플로나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걸 목표로 삼아야지.
한국인들과 아침을 먹기로 해서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그들의 숙소는 내가 묵은 공립알베르게 보다 아늑했다. 어제 낯가리지 말고 그냥 같은 숙소에 묵을 걸. 심지어 알베르게에 동키 서비스도 안내가 되어있었다. 택시 동키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바나나와 카누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8시가 다 되어 가자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배낭을 메고선 한 걸음 걷기도 힘들어서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 했는데 드디어 카메라로 여러 풍경을 찍게 되겠구나 설레기 시작했다. 어느덧 8시가 조금 넘었는데 알베르게 앞에 주차하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베르게 주인에게 가서 여쭤보니 택시는 나인 어클락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자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국인 일행들과 함께 출발하기로 했는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다들 팜플로나에 가서 도시 구경도 하고 라면도 빨리 먹고 싶을 텐데 나 때문에 일정이 늦춰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들떠있던 기분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동갑인 한국인 친구가 택시 동키를 기다려 줘서 함께 팜플로나로 향했다. 힘들어질 때쯤에 바에서 쉬고자 했지만 일요일이라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발바닥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어제와 오늘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진흙길을 걸어야 했고 도중에 돌길도 많아 발에 무리가 많이 가는 코스였다. 심지어 범람한 강 바로 옆에서 걸어가야 해서 공포감마저 들었다. 날씨도 변덕스러워서 비가 내렸다가 해가 떴다가를 반복했다. 높은 언덕을 오르기 전, 발 상태를 확인해 봤는데 양쪽 발 모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제는 택시를 타지 않고 다음 마을까지 내 발로 걷고 싶은 오기가 생겨 물집 부분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언덕을 넘자 무언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트렁크에서 꺼내고 있는 현지인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봉지를 내려놓더니 미소를 지었다. 봉지 속에는 오렌지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게 바로 순례길의 오아시스, 푸드트럭이구나. 비성수기라 그런지 푸드트럭보다는 소박하게 한 봉지만 갖다 놓고 파는 모양이었다. 난 1유로에 오렌지를 샀고 한입 먹는 순간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 수분과 당분이 부족한 이 상황에서 오렌지는 이 두 개를 한 번에 충족시켜 주는 최고의 과일이었다. 오렌지 덕분에 팜플로나까지 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팜플로나에 들어섰지만 공립 알베르게까지 가려면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오렌지 부스터는 제 몫을 다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드디어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운이 나 힘을 내서 걸었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 문을 열려고 하는데 싸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FULL. 설마 아니겠지 하고 체크인을 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침대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근처에 알베르게가 많다며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난 공립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한 내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곳은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다시 공립 알베르게로 가서 우리의 상황을 말하니 주인아저씨는 한 숙소를 알려 주셨다. 그곳은 에어비엔비처럼 가정집을 개조해서 숙박업소로 사용하는 곳 같았다. 뒤늦게 도착한 한국인 세명도 이 숙소에 묵게 되어 우리는 짐을 푼 뒤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스페인은 보통 저녁 식사를 7시에 시작해서 5시에 식당을 찾아 나선 우리에게는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걷다 보니 다행히 버거킹이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막상 음식을 받고 나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하게 운동을 하고 나면 속이 불편해지고 구토를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너무 무리해서 걸은 듯했다. 일행들에게 내가 주문한 음식을 건네고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침낭에 누워있으니 다시 속이 진정되었다. 아시안 마트에서 사 온 오렌지로 조금이나마 허기를 달랬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은 바늘로 꿰매야 하는데 아직 바늘을 사용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스페인 약국에서 산 물집 밴드를 붙여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