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움 주의. 슬픔의 삼각형 주의.
새벽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새벽 5시쯤 배고픔에 못 이겨 로비로 나갔다. 어제 저녁으로 먹으려다 입맛이 없어서 가방에 넣어둔 빵을 데워 먹었다.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는 빵 오 쇼콜라였다. 어렸을 때 빈속에 초콜릿을 먹고 배가 아파 바닥에 뒹굴었던 사실을 잠시 잊고 아주 맛있게 먹었다(후에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먹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에 내가 앉아 있는 로비로 들어왔다.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그제야 한국인들과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일찍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다들 걷는다고 하니 나도 걸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들 나만큼이나 배낭도 커 보였다. 커피를 한잔에 카페인에 취한 나는 그들과 같이 걷기로 결심했다. 30km나 되는 거리를 다 걷기엔 힘들 것 같아서 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택시를 타자는 계획을 세우며 까미노를 걸었다.
초반에는 오르막이 없어서 그런지 걸을만했다. 오르막이 나오기 시작하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일행들과 난 점점 멀어졌다. 아직 다음 마을인 발카로스까지는 거리가 많이 남아 체력 분배를 위해서는 천천히 걸어야 했다. 아무리 걸어도 발카로스는 보이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빵 오 쇼콜라를 먹은 탓인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배가 쉴 새 없이 부글거렸다. 이곳은 순례길. 성스러운 길이자 내 뒤에는 순례자가 계속해서 걸어오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절대 실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괄약근에 힘을 주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걸었다. 끊임없이 오르막길이 나와 쉬고 싶었지만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출발한 지 세 시간 반 만에 발카로스에 도착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토일렛 토일렛” 하며 화장실을 찾았는데 사장님은 먼저 메뉴를 정하라고 말했다. 난 “또르띠아, 카페 솔로, 아구아”를 외치고 wc 표지판을 향해 뛰었다. 잘 참은 나를 셀프 칭찬하며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바게트 반쪽에 계란이 들은 샌드위치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또르띠아를 샌드위치 형태로 파는 모양이었다. 배가 고파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어째서인지 한 입 먹자마자 음식이 물렸다. 입에 맞았음에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커피도 두 입 만에 끝났다. 대신 목이 말라 물은 한 컵을 다 비웠다. 이후의 참사는 한입에 다 털어 넣은 물 때문인 걸까.
슬슬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갈까 싶어 레스토랑 사장님에게 번역 앱을 이용해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드렸다. 그녀는 15분 뒤에 택시가 올 거라고 말했고 나는 그라시아스라고 하며 감사를 표했다. 택시 부르는 것까지 별 어려움 없이 끝났다. 오늘의 고비를 넘기고 앞으로 순탄할 것만 같았던 첫 번째 여정. 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게 된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점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론세스바예스 근처에 다다르자 입 안에 신물이 느껴졌고 오랜만에 구역질이 났다. 스톱을 외치기도 전에 이미 입에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뒷자리에서 파티가 열린 걸 알아챈 택시 기사는 연신 쉣을 외쳐댔다. 난 쏘리쏘리 하면서 두 번 더 파티를 열었다. 심지어 택시 탈 때 알베르게를 잘못 알려줬는지 다시 주소를 알려줘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몰 머니를 외치며 택시 기사를 달랬다. 그는 내게 80유로를 요구했는데 나는 10을 더 얹어 주었다. 그의 표정이 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솔직히 80도 세탁비를 포함해서 부른 느낌이었지만 죄송한 마음에 없는 팁까지 내밀었다. 한국인 순례자가 차 안에서 구토를 한 이야기가 마을 곳곳에 퍼질 것 같다. 어글리 코리안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론세스바예스는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3월인데도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성당 이곳저곳을 찍으러 다녔다. 그리고 다시 체크인을 하는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는 한국인 한 명과 외국인 한 명이 도착해 있었다. 보통 3시에서 4시쯤에 도착한다고들 하는데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그들에게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동키 서비스로 온듯한 캐리어가 있어 캐리어에 달린 번호를 왓츠앱에 저장해서 내일 배낭 배달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2시가 지나자 침대 배정을 받았는데 2층이었다. 체크인할 때 나이를 물어본 걸로 봐선 젊은이들은 2층으로 배정해 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었다! 1층 침대나 난간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나중에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작은 받침대를 발견했는데 한 개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사람들이 침대에 자리를 잡아갔다. 택시 점프를 한 사람은 나뿐이겠지. 모두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내일 동키가 가능하다면 나도 반드시 내 발로 완주하리라. 그러나 왓츠앱은 묵묵부답이었다. 오전까지 함께 걸은 한국인이 밥을 먹지 않겠냐고 제안해 왔다. 완주를 한 사람들은 모두 칼로리를 많이 소비했는지 매우 배고파했다. 구토로 장을 완벽하게 비워낸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알베르게 위쪽에 있는 작은 바로 향했는데 선반에 맥주병이 놓여있어 갑자기 맥주가 땡겼다. 택시비로 한 번에 10만 원 정도를 지출한 탓에 난 제일 싼 치즈 햄 튀김과 맥주로 골랐고 일행은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맥주는 아주 시원하고 맛있었다. 튀김은 손바닥 보다 작았지만 안주로 먹기 딱이었다. 일행이 시킨 순례자 메뉴로 토마토 스파게티가 나왔는데 양이 많다고 해서 나도 반 정도 나눠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파스타 맛이라 이것도 아주 잘 넘어갔다. 그리고 일행으로부터 안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왓츠앱으로 보낸 배달 업체가 3월 말부터 영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이 진실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몇 시간 전 보낸 문자에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내일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한다니. 잠시 현실을 도피하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려고 하니 직원은 순례자 메뉴 가 아직 다 나오지 않았는데 계산을 하겠냐고 물었다. 순례자 메뉴는 13유로였는데 우리는 당연히 한국물가를 생각해서 토마토 스파게티가 다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직원이 가져다준 접시에는 뽀얗고 큰 닭 가슴살 두 덩이와 감자튀김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와인도 가져다주었다. 배불렀던 우리는 닭 맛만 보고 나머지는 포장을 부탁드렸다. 다시 계산을 하려는데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 남아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놀라움에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스페인 물가가 저렴하기도 저렴하지만 순례자들 배를 든든히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아 감동적이었던 식사였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다시 눈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