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 X의 화딱지

제5장: "제가요? 지금요? 왜요?" – 궤도를 맞추는 시간

by 박중근

민후가 이마 위의 'ㄹ'을 돌려 쓰기로 결심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시험대가 찾아왔다. 오후 4시, 본부 보고를 위한 데이터 정리 업무가 급하게 떨어졌다.


민후는 예전처럼 예인 씨의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툭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그의 시야에 옆 팀 마 팀장의 풍경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 팀장은 팀원 한 명을 세워두고 손가락질하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야! 내가 이거 지금 바로 하라고 했지? 왜 안 하고 있어? 머리는 장식이야? 너 때문에 본부장님한테 내 체면이 뭐가 돼!”.


마 팀장의 팀원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 팀장은 지시의 '이유' 대신 자신의 '체면'과 '탈모 스트레스'만 쏟아내고 있었다.


민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예인 씨에게 다가갔다.


“예인 씨, 바쁘겠지만 이 데이터 정리 좀 부탁해도 될까?”.


예인 씨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팀장님, 제가요? 지금 루틴 업무 중인데요. 그리고 이걸 지금요? 퇴근 두 시간 전인데… 무엇보다 이걸 왜요? 지난번이랑 중복되는 데이터 같은데요.”.


민후의 가슴 속에서 다시 '화딱지'의 불길이 일렁였다. '왜요?'라는 질문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민후는 마 팀장처럼 폭발하는 대신, 미로가 말했던 '상대의 의자'에 앉아보기로 했다.


“예인 씨, 당황스러울 수 있어. 갑자기 업무가 추가됐으니까. 그런데 이 데이터는 본부장님께 우리 팀의 이번 달 성과를 어필할 결정적인 근거가 될 거야. 예인 씨가 지난번에 정리해준 로우(Raw) 데이터가 워낙 정확해서, 흐름을 가장 잘 아는 예인 씨가 마무리해주면 본부장님도 우리 팀의 노력을 제대로 알아주실 것 같아서 그래.”.


민후는 예인 씨의 '궤도'와 팀의 '궤도'를 맞추기 위해 정성껏 맥락을 설명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늘 "왜요?"라며 방어벽을 치던 예인 씨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차분하게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 본부장님 보고용이었군요. 제가 지난번에 했던 거랑 연결해서 한 시간 안에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예인 씨는 처음으로 '왜요?'라는 방패를 내려놓고 자기 스스로 업무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시가 아닌 '설명'이, 강요가 아닌 '예의'가 통한 순간이었다.


퇴근 후, 거실에서 민후를 기다리던 미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강 팀장, 오늘 ‘궤도 맞추기’ 꽤 근사했어. 마 팀장은 팀원을 자기 중력 안으로 강제로 끌어당기려다 충돌하지만, 팀장님은 예인 씨의 인공위성이 어디로 흐르는지 보고 그 곁에서 나란히 달려준 거잖아.”.


“미로야, 사실 설명하는 게 지시하는 것보다 훨씬 피곤하긴 하더라. 말 한마디면 끝날 걸 구구절절 맥락을 짚어줘야 하니까.”.


“그게 바로 리더의 인건비야. 설명하기 귀찮아서 지시만 하면, 나중엔 예인 씨가 귀찮아서 대충 일하는 걸 견뎌야 할걸?. 궤도를 맞춘다는 건 상대가 나와 같은 곳을 보게 만드는 마법이야. 예인 씨가 오늘 스스로 움직인 건 명령 때문이 아니라, 강팀장이 보여준 '존중'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


미로는 민후의 발등에 턱을 괴며 덧붙였다.


“근데 이렇게 궤도가 맞춰졌을 때 조심해야 할 게 있어. 바로 ‘완벽주의’라는 덫이지. 내일은 예인 씨가 궤도 이탈을 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줄 차례야. 실패할 권리 말이야.”.


민후는 수첩을 펴고 오늘 예인 씨와 나눈 대화의 맥락을 적었다. 리더의 권위는 목소리 크기가 아니라, 팀원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의 두께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몸소 배우고 있었다.



� 미로의 한마디: "설명하기 귀찮아서 지시만 한다고? 그럼 예인 씨가 귀찮아서 대충 일하는 것도 참아야 할걸? 리더의 친절한 맥락 설명은 팀원의 자발성을 깨우는 가장 강력한 리더십 연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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