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비포 썬 라이즈'를 보고
“딸, 엄마는 딸이 비포 선 라이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컸으면 좋겠어. 자신이 옳다는것에 대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고, 때로는 한눈에 반하는 사랑도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보았던 여주인공 셀린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상을 보여주는 외모이지만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지니고 있는 당당함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매료되었다.
비포 선 라이즈(1996,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기차에서 만난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여자 셀린(줄리 델피)이 제목에서 보여지듯 다음 날 일출 전(비포 선 라이즈)까지 이루어지는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비행기 예매 시간 때문에 하루가 채 안되는 제한된 시간 안에 서로에 대한 호감이 사랑으로 진행되는 감정선이 애틋하게 표현된다.
그 안에서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백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이다. 서로의 과거 사랑에 대한 탐색과 사회에 대한 시각, 가치관 등을 넘나드는 대화는 관객에게 잠시도 한눈 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수많은 사랑의 대사와 철학적 논쟁 등이 숨이 찰 정도로 쏟아진다.
초반에는 서로에 대한 탐색으로 과거의 연애사와 이성 취향 등을 묻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의 숨기고 싶었던 가정사, 철학적 이야기 등으로 대화의 내용은 깊어진다. 대화의 상대가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부모의 이혼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할 말들을 쉽게, 그리고 솔직히 털어 놓는다. 그 과정에서 초반의 단순한 호감은 서로의 다름에서 오는 매력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지만(물론 두 배우를 보면 안 반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분 1초가 아쉬운 사랑으로 변해간다.
특별한 조연배우도 없이 두 명의 주연 배우가 100분의 시간을 이끌어간다. 티키타카가 이루어지는 두 배우의 목소리 조화도 뛰어나고, 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배우의 표정과 눈빛의 변화만으로도 사랑이 익어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셀린의 부드러운 당당함이다. 딸이 셀린처럼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부분 영화에서 여성은 두 종류로 나뉜다.(물론 나의 주관적인 분류이다.) 하나는 부드러움을 장착한 여성의 모습이다. 조신하고 참한 모습이거나 예쁘고 귀여운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여성이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단골 여자 주인공상이다. 또 한 종류의 여성은 당당한 여성의 모습이다. 정의의 사도처럼 나오는 남성의 당당함보다 여성의 당당함은 부정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당당함이 지나쳐 당돌하다고 표현되거나 때로는 섹시함을 장착한 여전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셀린은 나에게 신선했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한껏 뽐내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철학적 사고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현명함과 당당함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이 매력 때문에 나는 비포 시리즈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남녀가 아닌 인간과 인간을 보았던 것 같다. 많은 서사들은 남성이 우월하거나 바보 온달처럼 한참 모자라게 나온다. 수평적이기 보다는 항상 한 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이 서사를 이끌어 가기 용이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영화는 두 남녀가 틀림이 아닌‘다른’존재로, 그리고 ‘대등한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이 나의 마음을 열게 한 것 같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또다른 이유는 철학적인 대사들이다. 13살에 자신과 같은 나이에 죽은 아이의 묘비를 보며 고민한 죽음에 대한 성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쇠라의 그림 분석, 종교에 대한 대화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 풍성한 철학적이고 사회적 주제를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다. 여성과 남성, 유럽과 미국, 노인과 어린아이 등의 대립적인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문제 제기일 뿐 갈등 없이 대화는 이어진다. 관객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를 던져준다. 이 정도로 쉼 없이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이라면 주인공인 그들만 모를 뿐 관객은 이들이 운명적인 관계임을 직감할 수 있다.
비엔나 구석구석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두 주인공의 사랑과 철학적 대사들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지금 당장 비엔나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엄마, 나는 셀린처럼 낯선 사람하고 저렇게 말 많이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가치관이 확실해서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히는 거 정말 싫어. 그리고 즉흥적으로 남자 따라 기차에서 내리는 행동 따위는 절대 네버 안 할 거야. 엄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단 호크, 내 타입 아니야. 그래도 엄마가 비엔나 가자고 하면 그건 오케이”
그렇다. 셀린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내 관점이고 내 딸은 내 딸만의 개성과 매력이 있는 거다. 이제 보니 우리 딸이 다 컸네. 올해 우리 딸이랑 비엔나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줄리 델피와 에단호크는 없지만 우리 딸과 함께면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