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와 나
날씨가 우중충하다. 날은 습하고 기온은 높아진다. 우리는 이 시기를 장마라고 부른다. 내가 1년 중 가장 혐오하는 기간이다. 나의 땀샘이 열리고 이에 따라 나의 머리카락은 프링글스가 되어 나의 여유로운 수업을 방해하는 시기다. 긴장을 하면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땀이 흐르면 더 긴장하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요즘 나는 꽤나 머리가 큰 탁상용 선풍기를 손에 들고 교실로 들어간다. (보는 다른 샘들도 아이들도 보며 낯설어 한다) 더위를 많이 타서 나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교무실에서도 선풍기 없이는 살 수 없다. 3월부터 11월까지 내 책상에서 선풍기는 나의 땀을 말리기 위해 열일한다. 오늘, 날씨만큼이나 기분도 우중충하다.
이 기분을 조금 날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무언가... 역시 나에게는 노래보다는 영화다. 지금 내 머릿 속에서 기억나는 영화 한 편.
내가 이 영화 제목을 처음 들은 건 2017년 우리 반 아이를 통해서였다. 이 아이는 영화를 좋아했고 미디어 관련 학과를 진학하고 싶어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한편 쯤은 면접에서 물어볼 수 있으니까 준비하자. 어떤 영화 제일 좋아해?”
“미드 나잇 인 파리요”
“어떤 영화야?”
“음, 과거의 여성과 사랑하는 영화요”
“사랑 얘기 말고 좀 괜찮은 영화 없어? 다른 영화 찾아봐”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었고 그다음 해에 넷플릭스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나는 그 아이에게 다른 영화를 찾아보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다음 해에도 나는 고3 담임이었고 생기부 작성, 보충수업, 상담, 자소서 지도 등으로 바쁜 여름방학에 밤 12시가 되면 30분 간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은 나에게 최고의 힐링이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이 영화 제목을 보고 ‘어? 성재가 말했던 그 영화네’라는 생각과 함께 아무 망설임 없이 창을 열고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2010년에 작가인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와 함께 파리에 왔다가 우연히 1920년 대로 시간 여행을 가게 되고 그 당시의 예술가들 – 피카소, 달리, 헤밍웨이 등-을 만나게 된다. 그중 피카소의 뮤즈인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시대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예술과 문학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는 황금기를 동경하고 그 시대인 1920년대를 경험하는 자신의 시간 여행을 행복해한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고갱과 드가를 만날 수 있는 1890년대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고갱과 드가는 르네상스를 동경한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요. 그럼 또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족스럽죠, 삶의 원래 그러니까”
아드리아나의 대사처럼 모두들 자신이 동경하는 시대가 있지만 그건 모두 자신의 이상과 경험에서 온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존재해야 할 곳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느끼고 현재로 돌아와 자신과 가치관이 다른 약혼녀와 헤어지고 비 오는 파리에서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남자 주인공이 1920년대를 동경하지만 1920년대에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에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모두 남의 것을 탐하고 남의 더 큰 떡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 떡이 사실은 더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며 살기란 어려운 듯하다. 커다란 진리를 깨닫고 현재를 사랑하기로 맘 먹은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 그의 삶과 깨달음이 부러워지는 건 모순일까?
이 우중충한 날씨에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 마지막에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걷는 모습과 그에 어울리는 OST의 조합 때문인 듯하다.
시험문제 출제와 수행평가 채점을 마친 간만에 여유 있는 날이다. 오늘은 집에서 적당히 끈적거리면서 적당히 몽환적인 OST를 들으며 마리옹 꼬띠아르와 레아 세두의 얼굴이 보고 싶다. 인간적으로는 문제가 있었지만 영화는 잘 만드는 우디 앨런은 참 얄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