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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레터'가 소환한 나의
첫사랑

오겡끼 데스카?

by 쥬디

영화 ‘러브레터’가 소환한 나의 첫사랑

설원을 무대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는 영화로 한때

“오껭끼 데스카(잘 지내고 있나요?)”

라는 말을 유행시킨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재개봉했다. 20대 극장에서 보고 몇 년 전 dvd로 봤다.

어제 아들과 함께 세 번째 보러 추위를 뚫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나 책은 다시 볼 때마다 감흥이 다르고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어 이번에는 어떨까 궁금했다.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눈 위에 누웠다 일어나 하늘을 쳐다보고 마을로 내려가는 첫 장면에서 ‘His smile’ 음악이 나오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 전 영화의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 역을 맡았던 ‘나카야마 미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화면에서는 저렇게 풋풋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이제 세상에 없어 슬펐다. 50대 중반인데 안타깝다. 그래선지 영화가 더 애틋하다. 그녀는 1인 2역을 맡았다.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 등산도중 사망하고 그의 추모 2주기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연인의 방에 들어가 앨범을 보며 이름을 발견하고 중학교 때 살던 홋카이도의 오타루 옛 주소를 찾았다. 이츠키의 어머니는 오래전 이사온 데다 이젠 국도가 났다며 사라진 주소라고 말한다. 아직도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는 ‘잘 지내고 있나요?’라는 편지를 보낸다. 어차피 받지 못할 테지만 그리운 마음으로 보낸 건데 답장이 오기 시작한다. 연인과 이름이 같은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였던 ‘후지이 이츠키’에게 편지가 전달된 것이다. 둘의 편지 왕래를 통해 히로코는 연인 이츠키의 중학교 시절 모습을 알게 되고 여자 이츠키는 그 시절 같은 이름으로 겪었던 에피소드를 되살려낸다.


처음 영화를 봤을때 초반에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가 1인 2역을 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때 뭐지? 하다가 아하!라고 인정하며 봤는데 어제 아들도 나와 똑같이 뭐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이 눈 덮인 설국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면 하나하나를 고조시킨다. 아름답지만 녹으면 사라지는 눈이 마치 우리 인생 같은 찰나를 표현하고 있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져 풋풋한 첫사랑을 연주한다. 기타도 한몫 거든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 이츠키에 대해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픔과 추억이 전제가 된 스토리와 음악이라 더 애틋하다. 예전에는 ‘결국 죽은 이츠키가 스토리를 만들었네. 그런데 어쩐담! 그가 없잖아. 슬프다.’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는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여주인공이 실제로 세상에 없다는 슬픔부터 시작한다. 히로코를 예전부터 사랑했지만 친구에게 양보한 시게루가 잰틀하고 풋풋하다. 젊을 시절에 봤을 때는 나이 들어 보이고 건들거리는 느낌이었다. 남자 이츠키의 엄마도 나와 비슷한 오십대로 그때는 나이 든 중년이라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젊어 보이는 아름다운 중년으로 보인다. 중학교시절의 여자 이츠키역의 ‘사카이 미키’는 어리고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들은 사카이 미키가 정말 예쁘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도서관 독서카드를 활용해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재밌다. 남자 이츠키는 도서관 책들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을 읽지도 않으면서 쓴다. 그 이름이 사실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여자 이츠키 이름을 쓴 걸지도 모른다는 히로코의 말이 가슴에 확 꽂힌다. 남자 이츠키는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했지만 여자 이츠키를 좋아하는 감정을 독서카드에 이름과 그녀의 얼굴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걸로 남겼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다 그녀와 닮은 히로코를 보고 연인이 되었다는 설정인데 그렇게 되면 히로코가 너무 불쌍하니 영향은 주었지만 히로코대로 사랑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어쨌든 이야기 구조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죽은 남자의 첫사랑과 현재 사랑의 주인공인 여자들을 통해 추억과 그리움을 소환하는 형식이다. 어떻게 이런 복잡하고 애틋한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이제는 사라진 추억의 독서카드. 이걸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다.


3년 전 홋카이도를 갔다. 여름이라 눈대신 끝없이 펼쳐진 초록 들판과 울창한 숲만 보았지만 겨울이 되면 광활한 대지를 덮을 설국을 상상해 보았다. 히로코가 연인이 죽은 산을 향해 ‘잘 지내고 있냐’며 울부짖을 때는 역시 눈물이 났다. 이 나이쯤은 그런 사랑이 크게 와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슬프다. 그녀가 이제 없다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른다. 중학생 남자 이츠키가 좋아하는 건 여자 이츠키인데 그것도 몰라주고 다른 여학생을 연결해 주자 자전거 타고 가는 여자 이츠키 머리에 종이봉투를 씌워주는 장면이 재밌다. ost 중 ‘winter story’는 첫사랑의 풋풋함을 표현하려고 8살 소년이 피아노를 치게 했다고 한다. 피아노로 꼭 쳐보고 싶었던 곡이다.



중학교 때 시골이 집이라 버스를 타고 다녔다. 방과 후 많은 아이들이 터미널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녀공학이지만 반은 나뉘어진 학교를 다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저만치 서있는 남자애가 눈에 띄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 애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시원한 눈매에 하얀 얼굴을 가진 훤칠한 소년이었다. 나와는 다른 버스를 타는 그 애가 언제 나타나나 기다리곤 했다. 그 애 주위에는 항상 애들이 둘러쌌다. 그중 장난기 많고 촐싹거리는 애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자기 친구를 보고 있는 걸 발견한 촐싹이가 나를 쳐다보며 ‘자기 친구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눈치를 챘다는 표정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기분 나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방과 후 시내 서점에서 책을 사고 나와 걸어가는데 저만치서 자전거를 탄 두 남자애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앞에 탄 애는 터미널에서 내가 늘 기다리던 멋진 남자애고 뒤에 탄 애는 촐싹이였다.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촐싹이 손에는 긴 달력 같은 종이를 둘둘 말린 게 들려 있었다. 나를 보더니 씩 웃는 게 아닌가. 난 부끄러워 다른 길로 가려다가 땅을 쳐다보는 사이 지나겠지 싶어 그대로 걸어갔다. 자전거가 지나가는 동시에 내 머리에서 ‘탁’하는 소리가 났다.

“아야”

나는 아픈 머리에 손을 대며 지나가는 자전거를 돌아보았다. 그 촐싹이가 나를 보며 혀를 내밀고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나는 알고 있지롱”

말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살짝 웃기까지 한 거 같다. 이런 못된.... 촐싹이가 둘둘 말은 종이로 내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아픈 것보다 창피했다. 좋아하는 남자애 앞에서 바보 같은 촐싹이한 테 맞는 모습을 보이고 놀림까지 받다니... 화가 치밀고 눈물까지 찔끔 났다.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촐싹이가 한 짓 때문에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 이미지도 급격히 하락하면서 그렇게 나의 어설픈 첫사랑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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