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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디 May 29. 2024

제대로 여행을 즐기는 재능러

(열하일기 2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

며칠간 여기저기 다니느라, 열하일기를 못 읽고 있다가 오늘은 작정하고 도서관에 가서 읽었다. 연암의 캐릭터가 확실해서 ‘여행기’라기보다는 소설 느낌이 난다. 짜인 여정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지 곳곳을 다녀보고 관찰하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등 제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성경은 심양의 옛 이름이다. 심양의 이모저모라고 번역한 ‘성경잡지’는 7월 10일에서 14일까지의 여행 기록과 겪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은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와 중국의 젊은이들과 밤새 토론을 벌이는데 그야말로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많은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이다.     


예속재에서 나눈 이야기 (속재필담)

전사가, 이구몽, 목춘 등의 인물을 세세히 표현해 나열하고 있어 마치 눈앞에 그들이 있는 거 같다. 여러 사람을 이야기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풍채도 없고 기록할 게 없다며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대목이 재밌다. 연암이 목소정과 필담을 나누려 하자 중국의 학습법을 이야기한다. 중국은 귀로 듣고 입으로 외우는 방법으로 배우니 막상 쓰는 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이야기하자 조선은 음과 뜻을 함께 강의한다 말하니 그들은 그 방법이 옳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밤새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연암이 미안해하자, 고귀한 손님을 받들어 모시고 하루 밤 좋은 이야기로 보내는 것은 일생에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라고 하며, 다시 술까지 데우라고 하는 모습에 국경을 넘은 진심 어린 우정이 느껴졌다.      


상루필담 (가상루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장사하러 고향을 떠나 심양에 와서 일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황제가 지나갈 때도 아무나 우러러볼 수 없는 이야기 등을 하다 연암이 붓으로 글을 쓰게 된다.

“배생이 또 빈 筆帖(필첩)을 꺼내며 써주기를 청한다. 짙은 먹물을 부드러운 붓에 찍어 쓰니 자획이 썩 아름답게 되어, 내 스스로도 이렇게 잘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여러 사람들이 크게 감탄하고 술 한잔하고 그림까지 그리며 즐기는 모습은 진정한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다. 연암은 그야말로 현대로 말하면 재능러였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인물이다.      

강철의 ‘철’ 발음이 중국 사람들이 어려워하여 가르치려 하는 데서 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이야기의 주제는 상인으로 살아가는 애환, 사농공상의 신분제도, 고려에 잘못 전해지는 이야기 등 종횡무진이다. 연암이 이틀이나 내리 잠을 안 자고 대화하느라 길을 가면서 잠을 잤는데, 몽고 사람이 낙타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못 보자 크게 아쉬워하며 이후론 잠자거나 먹을 때라도 반드시 고하라고 단단히 일렀다라고 하는 장면에서 연암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    

  


7월 13일 기축일

‘하늘에는 달이 떨어져 별들만 총총하여 서로 깜박이는 것 같고, 마을에선 닭들이 번갈아 울어댄다. 몇 리를 못 가서 하얀 새벽안개가 끝없이 펼쳐져 넓은 요동 벌판에 깔리며 수은으로 된 바다처럼 되었다.’

문장이 아름다워 적어본다.      


‘기상새설’欺霜賽雪 

연암의 생각-

‘장사꾼들이 자기 본분을 자랑하기 위해, 심지가 희고 깨끗하여 가을 서리와 같고 또 희디흰 눈빛을 압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연암이 시장 점포에 이 네 글자가 걸려있는 걸 보고 이렇게 생각하여 전당포 주인에게 똑같이 써서 주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연암의 생각-

' 이런 조그만 곳에서 장사나 해 먹는 놈이 어찌 심양 사람들을 따라가기나 하겠나? 이 따위 거칠고 우락부락한 놈들이 글자가 잘 되었는지 어디 아냐? '

하며 기분 상해한다. 얼마 후 다른 점포에 들어갔다가 글씨를 쓰자 모두 놀라며 다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당포 주인에 대해 설욕을 하려고 다시 ‘기상새설’을 쓰자 그들의 표정도 또 같아지길래 물으니, 자기 점포는 부인네들의 장식품을 취급하는 곳이지 밀가루를 취급하는 게 아니라 한다. 연암이 그제야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기상새설의 원 뜻은 '밀가루가 서리보다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걸 자랑하는 거였다' 그리고 다시 장식품 파는 가게의 특징을 생각해 부가당 副珈堂-비녀를 지르고 온갖 장식을 한다-이라고 써주자 환호를 지른다. 

현대로 말하면 가게 앞에 요란하게 붙은 홍보문구 같은 거였다. 연암은 여행길에서부터 타국의 가게까지 홍보해 주는 역할까지 한 거였다. 그리고 기상새설의 해석은 참으로 기발하고 창의적이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십장자에 도착해 초상난 집에 상가 제도를 구경하려고 들어가자 상주가 뛰어나와 곡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울부짖는 데 연암이 너무 놀라 어찌할 줄 몰라하는 글은 정말이지 포복절도할 일이다. 영화나 만화로 이런 에피소드를 만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했다. 그 틈에 자세히 사람들과 제도를 관찰하고 적어놓은 걸 보면 명석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쓰면서 한 번 더 웃는다. 인간적인 면모에 점점 더 끌린다. 이제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연암박지원 #열하일기 #재능러 #기상새설 #심양 #진짜배기여행 #최고의 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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