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 멋쟁이 언니

한글공부는 즐거워

by 쥬디

85세 멋쟁이 언니는 오늘도 일찍 일어나 삼십여 분 스트레칭을 하고 한 시간 동안 기원과 명상을 한다. 마음을 고요히 정돈하고 밥을 짓고 맛나는 반찬을 해서 아직도 튼튼한 이로 아침을 먹는다. 평생 동안 옷장사를 하며 억척같이 살아오면서도 미뤄왔던 게 있었다. 제대로 된 한글 공부였다. 어릴 때 무식한 아버지 덕분에 학교도 못 가보고 한글을 눈동냥 귀동냥으로 이 글자가 이런 뜻인가 보다 하며 대충 어림짐작으로 살았다. 드디어 84세에 노인복지관에서 한글을 제대로 배우고 책을 줄줄 읽어가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안과 밖이란 말에서 밖의 받침이 쌍기역인것과 부엌의 받침에 ㅋ이 들어가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문제는 돌아서면 까먹는 나이가 되어 매일 아침밥을 먹고 치우면 책상에 앉아서 배운 걸 잊지 않기 위해 책을 필사한다. 한자 한자 정성 들여 쓴다. 차곡차곡 노트에 글자가 채워지는 게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집에 손님이 오면 노트를 펼쳐 자랑하느라 바쁘다.

살아오면서 한글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젊은 시절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이름이나 인적 사항을 써야야는 데 은행원 앞에서 차마 한글 모르는 걸 들키기 싫었다. 멋쟁이 언니는 갑자기 생각난 듯

“아! 볼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말하고 은행을 빠져나와 길 건너편 약국으로 들어가 반창고 하나를 사서 검지에 둘둘 말았다. 다시 은행을 가서는 손가락이 다쳐서 글을 못쓰니 대신 써달라 해서 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큰딸이 초등학교 들어가 한글을 뗀 다음에는 관공서 갈 때 딸을 앞세워 다녔다고 한다.

멋쟁이 언니는 아직도 피부가 팽팽하고 허리가 꼿꼿하다. 장롱에는 예전에 샀던 비싼 옷도 즐비하고 가까운 곳에 가더라도 잘 차려입고 화장하고 나간다. 술도 그렇게 많이 마시고 담배도 하루 한 갑씩 피워서 고지혈증에 당뇨 등 먹는 약이 서랍에 가득해도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 쑤신다, 못 살겠다, 괴롭다’등등의 이야기는 전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한참 동생인 78세 지인이 있다. 그녀는 귀가 어둡고 멋쟁이 언니만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나이가 그리 안 들어 보여요.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아이고 나는 입맛도 없고 밥맛도 없고 삭신이 안 아픈 데가 없고 매일 약 먹다 판나고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어휴."

만날때마다 듣는 레파토리에 멋쟁이 언니는 슬슬 짜증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똑같은 푸념을 다 들은 후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죽어.”

“......”

멋쟁이 언니의 일침에 78세 동생은 다시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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