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첫사랑
은지는 매일 바쁘게 공부하다가도 마음이 갑갑하고 울적해질 때도 있었다. 풀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했다. 은지는 7살부터 싱가포르에 오기 전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맞벌이하는 엄마가 은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보내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은지는 피아노학원 가는 걸 좋아했다. 피아노가 창조하는 음악이 힐링과 위로의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국립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은지는 가끔 음악실을 찾아 피아노를 쳤다. 음악선생님이 언제든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치고 싶을 때 와서 연주하라고 했다. 4월 초 점심을 먹고 그날도 음악실 문을 아무 생각 없이 드르륵 열려고 하는데 안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났다. 살짝 열자 한 남자애가 몰입해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익숙한 곡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보면서 감동하며 두고두고 이야기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스파클’을 치고 있었다. 화려한 하늘에 혜성과 유성이 떨어지면서 흐르는 ‘스파클’은 감수성 풍부한 은지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요즘 어딜 가나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음악이었다. 기회가 되면 악보를 구입해 쳐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남자애가 치는 걸 듣게 될 줄이야.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벌리고 듣고 있는데 남자애가 음지쪽을 쳐다보고는 갑자기 멈췄다.
“어머 내가 방해했네. 미안. 그냥 계속 연주해”
은지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냐. 너도 피아노 치러온 거잖아. 나는 많이 쳤으니 그만해도 돼”
“저기 있잖아 그 곡 스파클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곡인데 한 번만 처음부터 쳐주면 안 되겠니?”
남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다가 쑥스럽게 웃었다.
“아직 잘 못 치는데”
“내가 듣기엔 완전 전문가 수준인데? 부탁할게”
“그래? 그럼 그냥 한번”
남자애는 전주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음악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큰 눈과 상냥한 미소를 가진 말레이시아계 남자애가 능숙하게 긴 손가락으로 건반을 오가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은지는 이 순간에 압도되었다. 마치 ‘너의 이름은’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던 타키와 미츠하가 황혼의 시간에 아주 잠시 만나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애의 연주가 마치면 그 시간이 끝나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는 애니의 세계가 아니다. 은지가 감동하며 듣고 있는 사이 음악이 끝나고 남자애가 일어났다. 그제야 은지는 박수를 치며 현실로 돌아왔다.
“와 너 진짜 잘 친다. 나도 배우고 싶은 곡이거든. 잘 들었어.”
“너는 b반이지? 난 a반이야”
은지와 남자애의 스파클이 튀는듯한 만남 이후 자주 음악실에서 만났다. 남자애 이름은 모하맛 빈 압둘라라고 했다. 말레이계 이슬람 소년이었다. 깊고 차분한 눈매에 가만히 있을 때도 약간 미소 띤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지는 모하맛에게 스파클을 배웠다. 둘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하맛은 클래식과 뉴에이지 애니음악등 두루두루 다양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지브리 애니음악의 대가 히사이시조의 음악들을, 어느 날은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했다. 은지도 몇몇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줄 알았지만 모하맛의 실력과는 한참 차이가 있었다. 지기 싫어하는 은지는 모하맛이 음악실에 오지 않을 때 혼자 가서 연습하곤 했다. 은지는 집에 와서 과제를 마치고 잠들 때면 모하맛이 권해준 음악을 몇 번씩 듣고 자곤 했다. 어느새 은지 마음속에 모하맛이 들어와 있었다. 16살 소녀에게 첫사랑이 찾아와 있었다. 둘은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만나 방과 후에 시내를 같이 돌아다녔다. 같이 포토샵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노래방도 갔다. 한 번은 클락키에서 출발하는 싱가포르 리버크루즈도 탑승해 데이트했다. 실외 좌석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둘은 허둥지둥 선내로 뛰어들어가기도 했다. 은지와 모하맛은 싱가포르 야경을 감상하며 시내를 걸었다.
“모하맛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 거야?”
“글세. 난 엔지니어가 꿈이니 공대를 갈 계획이야. 은지는?”
“피아노 치는 엔지니어라 멋지다. 나? 난 최고의 대기업에 들어가서 커리어우먼으로 일하고 싶어”
둘은 머지않은 미래를 서로 이야기했다. 은지는 모하맛이 점점 더 좋아졌다. 무슨 말을 해도 늘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다정함이 좋았다. 6월 초 모하맛의 생일이 다가오자 은지는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했다. 고민 끝에 손수 집에 초대해 한국식으로 밥을 차려주는 걸 생각했다.
“모하맛 우리 집에서 생일파티하자”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은지가 언제 음식을 만들어? 난 괜찮아.”
“간단하게 차릴 거야”
은지는 밥과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를 하나 사고 엄마에게 얼마 전 배운 돼지갈비찜을 해서 내놓을 계획이었다. 드디어 생일날 모하맛이 은지네 집 대문 벨을 눌렀다. 비가 막 그치고 시원해진 저녁의 설레는 공기가 바람이 되어 불고 있었다. 은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은 식탁에 음식을 갖다 놓았다. 열심히 만든 돼지갈비찜을 가운데에 탁 올려놓고 은지가 막 앉았다. 맞은편 모하맛의 다정하게 웃고 있던 미소가 갑자기 싸늘해지는 게 보였다. 은지는 순간 놀라 무슨 일인가 쳐다보았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
“왜 그러는데?”
은지는 불안해하며 물었다.
“은지야 나 이슬람교 믿는 사람이야 설마 돼지고기를 나보고 먹으라는 건 아니지?”
“...”
아뿔싸! 은지는 거기까지 생각 못하고 있었다.
“맞다. 깜빡했네. 이를 어쩌지?”
은지가 난처해하고 있는데 모하맛이 갑자기 일어섰다.
“나 그냥 집에 갈래. 오늘 나를 위해 준비해 준 건 정말 고마워.”
은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모하맛의 모습에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남자친구를 위해 만든 생일상에서 한 번도 본적 없는 싸늘한 미소를 마주하다니. 종교가 이렇게 대단한 거라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은지는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그날 이후로 둘 사이는 서먹함이 흘렀다. 모하맛은 이제 음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은지는 모하맛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모하맛은 그냥 지나가버렸다. 은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전화하며 눈물을 쏟았다.
“엄마. 모하맛과 이제는 완전히 헤어졌어. 그 돼지고기 때문에. 정말 속상해. 나 이제 돼지고기 안 먹을래”
“아유 우리 딸 속상하겠구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 애가 은지 남자친구 할 그릇이 아니네.”
“몰라. 몰라. 나 이제 다시는 남자친구 안 사귀고 공부만 할래”
현순은 이 국 만 리 떨어진 곳에서 어린 딸이 사랑과 이별을 혼자 감당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잘 자라고 있는 거 같기도 해서 살짝 안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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