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회
은지는 치열하게 공부했다. 국립싱가포르대학교(NUS)가 목표였다. 은지는 어느 책에서 목표는 지나치게 크다고 싶을 정도로 잡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다. 애초에 하버드를 가려고 싱가포르에 온 거라 이왕이면 싱가포르 최고의 대학을 가는 게 맞고 마침 하버드와도 교류를 하고 있어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슬로건도 마음에 들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를 감히 두려워 말라’는 말이 도전적이라 좋았다. 은지는 또한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기쁨으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 마음이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는 힘이 되었다. 시험 당일 은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앉았다. 경쟁은 아주 치열했다. 은지는 모든 시험문제 하나하나를 집중해 풀었다. 이제까지의 고생이 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시험장은 오직 긴장감으로 문제를 푸는 소리만이 들렸다. 시험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고 있었다. 무더위가 조금은 식은듯해 기분이 상쾌했다.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은지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청춘의 나날을 불태워왔다. 싱그런 바람이 볼을 스쳤다. 은지는 당당히 NUS 경영학부에 합격했다. 은지와 현순은 전화를 붙잡고 서로 한동안 감격의 눈물을 흘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은지는 행복했다. 점점 자신감이 은지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었다. 입학은 8월에 했다. 은지는 어느새 다민족 학생들과 어울리는 사이 사람 간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살아가는데 큰 재산이 되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자 은지는 인턴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최고의 기업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아시아 기업으로 탑을 유지하고 있는 싱가포르 항공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은지는 철저히 준비해 하나하나 면접관의 질문에 지혜롭게 답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인턴생활을 하면서 은지는 기업의 경영을 익혔다. 그리고 자신의 취업 최종 목표로 세계 일류 기업을 정했다. 바로 애플이었다. 꿈의 애플. 은지는 또다시 철저히 준비했다. 4번이나 되는 시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엄청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지는 어린 나이부터 도전하면 된다는 것을 몸으로 익혀왔기에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항상 자신의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면접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과제를 던져주고 즉석에서 해결하는 걸 보여주는 고난도였다. 은지는 자신 있었다. 12살부터 혼자 모든 일을 생각하고 헤쳐 나온 은지에게 있어 모의시험과도 같은 면접은 결코 넘지 못할 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하기 전 은지는 꿈의 직장인 애플에 최종 합격했다.
현순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딸을 늘 믿어왔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개척할 줄은 몰랐다. 현순에게 딸은 천년지기 만년지 기였다. 약한 몸을 더 혹사시켜 일해도 현순은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고 보람이 있었다. 애플은 하나의 왕국이었다. 회사 안에 헬스와 수영장 등의 운동시설부터 도서관 산책로 오락시설 여러 상점 등 일하면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시스템도 없었다. 일을 마치면 한두 시간 만에 퇴근해도 되고 어느 경우에는 외부에서 넷북만으로 업무를 하고 보고만 하면 됐다. 물론 프로젝트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신경을 써야 했지만 은지는 빈틈없이 해냈다. 보너스로 애플 주식을 증여받기도 했다. 애플은 들어가기가 어렵지 한번 들어가면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은지는 미국, 일본, 중국, 한국의 애플지점에도 견학을 갔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점이 있었다. 은지는 역시 싱가포르의 자유로움과 소박함이 좋았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싱가포르인으로 살아온 은지는 어느덧 29살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돼있었다. 이번 12월 은지는 한 달간 출장근무를 요청해 한국에 들어왔다. 현순은 몇 년 전부터 재봉일은 그만두고 일본어 번역과 작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현순은 일하면서 늘 일본어공부를 해서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출판사에 상의할 일이 있어 가려는데 은지도 따라나섰다. 은지의 이야기를 듣던 출판사 사장은 은지에게 온라인으로 살아온 인생 강연을 부탁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 거 같으니 해달라고 요청했다. 은지는 얼떨결에 하겠다고 말하고 집에 와서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제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현순이 제안했다. 영어로 강연하고 한국어로 통역하는 방법으로 하자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이 그 어려운 영어로 강연하고 다시 거꾸로 한국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은지의 온라인 강연은 진행됐다. 너무나 떨렸다. 애플 면접 볼 때보다 더 떨렸다. 나의 인생이야기라니. 쑥스럽기도 하고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러나 은지가 누구인가. 온라인 강연도 무사히 해냈다. 애플을 다니면서도 새로운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쥬디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질문했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바쁠 텐데 새로 프로젝트할 시간이 있나요?”
은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은 만드는 거죠”
끝
에필로그
지인의 딸 이야기입니다. 사실 지인과 딸을 딱 두 번 만나 들은 이야기에 상상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두 번의 만남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써야 할 원고가 있어 서둘러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