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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의 이유 있는 도전

평창동 북토크 나들이

by 쥬디

청춘들의 이유 있는 도전

인연은 참 신기하다. 어떤 기회로 어디서 만나 우정을 나눌지 알기 어렵다. 어제는 종로구 평창동에서 빛나는 청춘들과 인연이 닿았다. 청주에 계신 엄마를 만나러 가기로 했었는데 인문학 향기 톡방에 ‘텅’이라는 출판사 대표가 올리고 간 북토크광고 글을 놓치지 않은 언니가 새로운 곳에 도전해 보자 해서 얼떨결에 신청했다. 요즘 차를 쓰지 못해 몇 번이나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 거리를 네이버지도에게 물어물어 평창동에 있는 ‘서울 시립미술 아카이브’를 찾아갔다. 광화문쪽을 지나는데 시설을 가득 설치해 연말 분위기를 내고 있었고 경복궁 앞에는 늘 그렇듯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산책하고 있었다. 1711 버스를 타고 거의 다 와가는데 내 뒤에 탄 부부가 비행기 사고이야기를 해 깜짝 놀랐다. 전북 무안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하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였다. 마음이 아팠다. 지구상에서 비참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는데 또 일어나고 말았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한껏 들뜬 마음이 사라지고 가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언니와 약속했고 출판사도 기다리고 있으니 가는수밖에.


낯선 곳에 내려 둘러보니 멀리 어디서 본듯한 바위산이 눈에 띄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그림에서 본 적 있는 산이다. 검색해 보니 보현봉이라 나온다. 아카이브 2층으로 올라가니 젊은 사람들이 출판사에서 만든 흰 티를 입고 우리를 반겼다. 북토크 자리에는 덩그러니 청년 두 명만 앉아있고 텅 비었다.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라고 말해 살짝 들여다보니 뭔지 모를 사진이 잔뜩 있다. 자리에 앉으니 플라스틱 잔에 와인을 가져다준다. 왠지 모를 어색함과 위화감이 들어 언니를 쳐다보니 나와 표정이 비슷하다. 2시부터 5시까지라고 해놓고는 3시까지는 자유시간이란다. 이런이런. 언니에게 밥 먹고 오자하며 일단 나왔다. 청년들이 혹시 우리가 그냥 가는 건가 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서 우린 괜히 온 건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온 된장찌개와 반찬이 다 맛있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무슨 토크하나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살짝 나오자 하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근데 사람이 없어서 살짝 나오는 건 안될 거 같다. 역시 아까 그 인원과 내 옆에 한 청년이 와있을 뿐이다. 썰렁한 북토크장이구나 싶었다. 젊은 남자와 진행할 젊은 여자가 와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출판사 대표고 설립한 지 1년 됐다고 한다. 어떻게 오게 됐는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을 물었다. 나도 모르게 두 시간 걸려 인천에서 왔으니 온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말하고 말았다. 젊은 대표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럼요 그럼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3시가 되자 커다란 화면에 글씨가 나타나고 양쪽에서 젊은 여성 작가들이 나와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모자부터 신발까지 아이보리색으로 쫙 빼입었고 한 사람은 편한 차림에 출판사 흰 티를 입고 있었다. 먼저 오늘 참여한 사람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글과 그림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줄까요?라는 질문에 언니는 책의 영향을 나는 그림의 영향을 이야기했다. 진행자들이 자신들의 의견도 이야기하는데 논리적이고 거침없이 진행하는 말솜씨에 점점 빠져들었다. ‘텅’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이유는 요즘 시대는 개인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무조건 이게 좋은 거야 이 길을 가. 이걸 써. 이렇게 살아.라고 스마트하게 주입해서 개성이 매몰되고 있는 시대라 자칫하면 무기력해질 수 있으니 정해진 거 말고 느리더라도 세상에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텅 빈 공간에 하나씩 채우고 싶어 지었고, 그런 글들과 사진을 넣어 종합잡지-크기는 책사이즈-를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서 1년 동안 네 번의 잡지를 발행했다면서 작가로 기고한 자신들의 글을 화면에 띄우는데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했다. 문장이 짧고 시적이며 흡인력이 있었다. 내 옆에 있는 청년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그도 말솜씨가 아주 유려해서 와! 하고 내가 감탄하자, 진행자가 그 청년이 서울대 국문과 학생이라 소개한다. 와우! 그런데 점점 토크가 열기를 더해가면서 슬슬 자기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진행자도 처음에 와있던 대학생들도 모두 서울대생들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청년 두뇌들과 북토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티셔츠 입은 진행자는 엄마가 중국인이라 한국에 온 지 6년밖에 안 됐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고 작가활동까지 하는 중이었다.


나와 언니가 호응해주고 말을 자주 하자 우리에게 거의 집중해 진행을 했다. 우리는 인생 선배로서 느끼고 생각하는 점을, 그들은 청춘으로 살아가는 고뇌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애들과는 이런 객관적인 대화가 어려운데 여기서 그들의 고뇌를 보게 된 것이다. 끝으로 소감을 말해달라 해서 청년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노력과 글솜씨를 칭찬하며 상투적이지만 우리 미래가 밝다고 한바탕 웃으며 마무리하자 진행자들이 활짝 웃었다. 그들은 우리가 온 거에 감사하며 티셔츠와 자기가 읽었던 시집들을 선물했다. 새책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읽었던 책을 주다니 정말 청년다운 발상이다. 와인도 청년다운 생각이었다. 순수하다. 처음에 뭐지? 뭐지! 쭈뼛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순수한 청년작가들의 모습에 자극받으며 우리는 기분 좋게 나왔다. 웃으며 버스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저만치서 예쁜 외국인 여자가 오면서 ‘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 인사하며 지나간다. 우리도 인사하고 깔깔 웃었다.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다.


집에 오는 길은 빨랐다. 바로바로 지하철과 버스가 와서 도착해 아침에 쓰다만 인문학 글을 완성했다. 새로운 만남으로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훈풍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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