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남수 Jun 09. 2023

록과 로커는 자유와 저항의 주체일까

로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⑥

  4월호에서 다루었던 ‘히피(Hippie)’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록과 로커를 자유와 저항의 주체이자 상징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장르로서 록 그 자체, 록을 연주하는 인격으로서의 로커 그 자체가 자유와 저항만을 대표한다는 건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타이틀도, 유사 경력도 없는 아마추어 록 밴드 기타리스트가 이토록 단언을 하는 이유는 전문성을 공인(?) 받은 적 없는 나로서도 반대되는 사례를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30주년을 맞는 해에 1969년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총괄했던 마이클 랭이 다시 총괄 기획을 맡았지만, 낭만적 수사만 차용한 페스티벌은 위생시설과 안전관리의 미비, 물과 식량의 부족, 술과 마약에 취한 군중의 폭동,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 등으로 얼룩졌다.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건 한탕 크게 해 먹으려던 주최 측뿐만 아니라 주최 측의 무책임함에 분별없는 향락과 파괴, 폭력으로 대응한 관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록과 로커는 주최 측의 이윤에 대한 탐욕을 실현해야 할 주체이자 임계점에 다다른 관객의 분노를 터뜨릴 촉매제로 기능하는 데 그쳤다. 음악적 역량이나 음악에 담아낸 메시지 면에서 록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RATM(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록 밴드가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밴드와 관객 모두 30년 전 페스티벌에 견줄 만한 어떠한 메시지도 생산해 내지 못 했다. 자유와 저항이란 가치는 1999년 우드스톡엔 없었다. 

난장판이 된 1999년 우드스톡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 이미지


  이제는 해묵은 용어긴 하지만 등장했을 당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일상적 파시즘’의 제창자인 임지현 교수의 저서 “이념의 속살”(2001)에는 흥미로운 사례가 등장한다. 1999년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99 자유 콘서트’에 딸과 함께 간 임 교수는 기성세대에 직격탄을 날리는 밴드 래퍼의 외침과 그에 화답하는 젊은 청중들을 보며 어느새 반항의 주체에서 밀려난 자신을 씁쓸해 한다.(책에는 ‘패닉’의 래퍼 김진표가 ‘시나위’ 멤버들과 만든 팀이라고 쓰여 있지만 저자의 착오다. 리더 신해철이 영국으로 떠나며 해체되었던 록 밴드 ‘넥스트’의 남은 멤버들과 김진표가 결성한 ‘노바소닉’이 맞다. 임 교수가 갔던 콘서트에서는 영국에서 돌아온 신해철이 새로 결성한 밴드 ‘모노크롬’과 함께 무대에 섰다.) 그런데 노래를 마친 래퍼 김진표는 멤버들을 소개하며 노래할 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조직의 막내로서 정중하게 ‘형님들’을 소개한다. 임 교수는 록의 강렬한 사운드 속에서 ‘닥쳐 봐’를 외치던 래퍼의 상반되는 언행을 보며 저 몸에 밴 규율 권력이 어디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더욱 씁쓸해한다. 


  위의 일화를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아, 이게 이상한 상황인가?’였다. 나이 어린 막내가 형들을 소개하며 형님들이라 부르고 깍듯하게 대접하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록 기타를 친 지 3년여 지난 스무 살 무렵의 내 인식은 임 교수가 보았던 래퍼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상당한 이율배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그 음악에 담아낸 메시지와 나의 일상적 언행이 현저하게 모순된다면 정말 이상한 노릇 아닌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당연한 인식에 이르고도 하드록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리치 블랙모어의 카리스마적인 스타일을 동경했던 나는 밴드를 하며 형으로서, 선배로서, 때로는 선배도 만만하게 보는 후배로서 권위를 종종 내세웠다. 연배가 10년쯤 위인 형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에는 밴드 선배들이 ‘빠따’를 치기도 했고, 원산폭격 따위의 기합도 주었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꽤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직접적인 폭력만 행사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록 음악을 한다는 놈이 ‘카리스마’를 동경하며 밴드 멤버들에게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상황은 괜찮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결국 록과 로커는 자유와 저항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맞닿았다. 

딥 퍼플(Deep Purple)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


  서두에서 장르로서 록 그 자체, 록을 연주하는 인격으로서의 로커 그 자체가 자유와 저항만을 대표한다는 건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형식논리의 측면에서, 또한 대중음악 산업이라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그러한 단언은 성립한다. 다만 역사적 맥락 속에서 획득해 온 속성의 일부로서,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은 이들이 표현하고 열광하는 강력한 예술적 수단으로서 록은 자유와 저항을 대표하며 로커는 자유와 저항의 주체로 서 있다. 자유와 저항이 록과 로커의 전부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일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처음 록을 접하고 한참 기타를 치던 때엔 이러한 속성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20대 이후부터 조금씩 관심을 가지며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 40대인 지금에 와서는 록의 가장 특징적이며 중요한 속성이라 여기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록의 급진적 속성에 눈길을 더 두는 건, 타고난 꼰대 기질에 나이가 더해져 회생 불가능한 꼰대로 전락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나름의 자구책일 수도 있고, 삶의 방향을 그렇게 맞추어 가려 했던 흔적의 누적분일 수도 있다. 


============================

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록 음악을 통해 체화한 가치, 자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