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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Jun 26. 2023

노(老) 역사학자와의 추억

고 강만길 선생님을 기억하며

역사 교과서 편집자 시절 뉴라이트 세력이 칼춤을 추며 교육과정 내용의 개편을 시도했다. 그들의 의도가 관철된 대표 사례가 '민주주의'란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당시 검정 교과서는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추종했거나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있을 거라 의심되는 저자들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저주하며 만든 거라는 게 뉴라이트들이 밝힌 칼춤의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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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당시 한국 현대사 파트에는 분단 체제, 민족 모순을 극복하지 못 한 데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 발언을 두고 이승만과 그의 비호를 받는 친일 세력들이 남북 분단을 획책한 것이라는 관점과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는 관점이 충돌하고 있음에도 교과서에는 전자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뉴라이트는 '대안교과서' 출간으로 이에 맞섰고, 식민 지배를 받았던 것은 불행한 역사이지만 그 시기에 경제 발전과 사회 문화적 근대화를 이룬 건 사실이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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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관점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면서도 보수 정권의 세를 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직 자유민주주의'라며 반공 투사적 공세를 펴고, '식민지 시기 어쨌든 경제는 발전했고 우리에게는 축복이었을 수도 있다'는 망말을 하는 뉴라이트들의 행태를 두고 보기 힘들었다. 북한 왕조를 신봉하는 주사파들 만큼이나 뉴라이트들의 이념적 편향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고민이 많았다. 때마침 모교에 강만길 선생님 강연이 있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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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강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강연장을 찾았던 목적은 한평생 실천적 역사학자로 살아 온 분의 조언을 구해보려는 것이어서 질의응답 시간 말미에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강만길 선생님의 표정과 말씀은 여전히 생생하다. 30대 청년에게 80대 학자는 빙긋이 웃어 보이며 '어려울 거라는 거 잘 알고 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리고는 역사학자 비코의 나선형적 발전 사관을 이야기하며 지금은 상황이 암담하지만 분명히 나아질 날이 있을 거라며 길게 보고 가자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했던 답이라 말 자체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빤한 그 말 속에 평생의 삶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무게감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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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선생님은 역사 교과서 편집자로 오래 버텨 보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강연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썼고 노동단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강만길 선생님이 영면에 드신 요 근래까지 이 영역에서 버티고 있다.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여러모로 발전보다는 후퇴의 양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듯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 힘들다. 인생은 고통이라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도 해당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손자뻘 청년에게 빙긋이 웃어보이던 강만길 선생님의 연륜과 여유는 닮아가며 살아가야지. 빤한 이야기 속에 내 경험을 잘 채워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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