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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Jul 31. 2023

아버지

로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⑧

  지난 5월에는 내가 몸 담고 있는 밴드 “개차불스”의 밴드 공연을 했고, 뒤이어 다른 밴드를 하는 보컬의 요청으로 7월 공연의 객원 기타를 맡게 되었으며, 개차불스 보컬이 운영하는 카페의 언플러그드 공연 요청도 있어서 꽤 바쁜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차불스 공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환으로 모든 일상이 아버지 간병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 가지의 역할로 규정지을 수 없는, 그 다사다난한 삶의 흔적을 곁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어지럽게 얽혀 있는 상흔의 녹슨 날에 생채기도 나면서 이해와 오해로 점철된 관계를 맺어 온 가장 가까우면서 또한 가장 먼 존재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혼자 변도 제대로 보지도 못 하는 모습을 대하고 있자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해 아무렇게나 흘려버린 변이 뭍은 아버지의 흔적을 치우며,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거나 남의 집안일이라고 생각했던 시공간의 괴리가 부지불식간에 찰나로 좁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모아두었던 용돈을 가지고 친구와 악기점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희귀하고 생소했던 전자 기타를 사기 위해서였다. 세고비아의 산하 브랜드이자 일렉트릭 기타를 주력으로 하는 베스터(Vester)의 기타를 11만 원인가 주고 샀다. 도장이 떠서 싸게 주는 거라는 주인의 말을 믿고 일단 질렀다. 신경 쓰이는 것은 당시 고등학생으로서는 부담스러웠던 가격도 아니고, 주인장의 말이 거짓일 수 있다는 우려도 아니었다. 기타를 집에 들고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일렉트릭 기타를 사고 록밴드를 하겠다는 건 아버지보다 훨씬 가까웠던 어머니도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허락도 없이 일렉트릭 기타를 질렀으니 마음이 편할 리는 없지 않은가.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그 기타는 아버지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샀던 베스터 기타와 비교적 흡사한 모델


  반면 나와 기타를 같이 사러 갔던 친구는 아버지가 베이스 치는 것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현재 프로 베이시스트로 활동 중이다.) 그땐 참 부러웠다. 아버지와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도 그러했고.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에 내게 록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로 줄 정도로 음악적 교감을 나누었던 친구는 나보다 먼저 밴드를 시작했음에도 부모님과 갈등의 골이 깊었는지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렸다. 나는 아마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음악적으로 지원해 준 것은 일절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기타를 못 치게도 하지 않았으니. 독학은 숙명이었다. 기타 이론은 오래된 교본 한두 권에 의지하고, 실전 연주는 기성곡들을 귀로 카피하거나 조악한 악보를 보며 익혔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실력은 더디게 늘었다. 더디게라도 늘었기 때문에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 또한 숙명일 수 있겠다.


  대학에 가서 했던 첫 공연 때는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멤버의 부모님들이 제법 공연을 보러 왔다. 관객으로 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별로 탐탁지 않았다. 스무 살 넘은 성인들 록 공연이 유치원생 학예회도 아니고 자기 아이 이름 부르며 파이팅에 선물에 꽃다발이 다 무언가 말이다. 특히 뒤풀이 금일봉을 주었다는 아버지 한 분에 대해서는 짜증도 밀려왔다. 감자탕 한 그릇에 소주 한두 병을 나누어 마시더라도 알아서 하면 될 뒤풀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풍족하게 먹었던 것 같지만 불쾌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대학 밴드 정기공연 때 모습


  기실 그 불쾌함의 정체는 ‘낯섦’이었다. 아버지는 내 공연을 보러 온 적이 없고, 내 공연에 어떤 지원을 해 준 적도 없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일렉트릭 기타를 치고 록 밴드를 하는 것은 나의 영역일 뿐 아버지와는 접점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1년 전쯤 고향 친구 부친상 때문에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유튜브에 내 공연 영상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TV와 셋톱박스를 바꿔 유튜브를 TV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되자 큰 화면으로 한번 보고 싶다는 거였다. 내가 일렉트릭 기타를 잡은 지 딱 4반세기가 되는 해에 아버지는 내 공연 영상을 보며 평소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 또한 낯설었지만 이전의 낯섦과는 다른 낯섦이었다. 


  먼 거리도 거리이지만, 병환 때문에 아버지는 내 공연을 보러 오기 불가능할 것이다. 아버지의 병환이 더 깊어진다면 나 또한 기약 없이 기타를 손에서 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병 훌훌 털고 건강해져서 큰아들놈 향후 20년은 실컷 록 밴드 생활할 수 있게 말이다. 그때는 중년의 아들놈 공연도 보러 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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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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