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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Sep 13. 2023

에릭 클랩튼과 술

로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⑨

  영국 출신의 전설적인 록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일대기를 그린 〈에릭 클랩튼: 기타의 신〉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에릭 클랩튼을 모르는 사람들도 연인에게 바치는 발라드 “Wonderful Tonight”이나 하늘로 간 아들을 그리며 만든 팝 “Tears In Heaven”을 들으면 ‘아, 그 노래!’ 할 것이다. 영화에는 저 두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여 에릭 클랩튼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영상 자료와 증언들이 풍부하게 배치되어 있다. 


  생각보다 그는 불행했고, 생각보다 그의 삶은 엉망이었으며, 그럼에도 생각보다 그는 생존력이 강했다. 절친했던 조지 해리슨(그룹 ‘비틀즈’의 멤버)이 아내인 패티 보이드에게 소홀한 사이에 그녀와 사랑에 빠져 희대의 명곡 “Layla”를 만들어 바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패티가 곁으로 왔을 땐 마약과 술에 심하게 중독된 데다 바람을 피워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오는 등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는 건 영화를 보고 알았다. 이후 다른 여인과의 관계에서 아들 코너를 낳고 재기하려던 찰나 끔찍한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는 것 역시. 아들을 잃고 “Tears In Heaven”을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어린 아이를, 그처럼 비참한 사고로 잃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당시 3살이었던 아들 코너는 아파트 침실에 열린 창문 사이로 떨어져 추락사 했는데, 무려 53층의 높이였다.) 그런데 이 생지옥 같은 구렁텅이에서 에릭은 버려놓다시피 했던 스패니쉬 기타를 잡고 음악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생존과 함께 예술의 위대함을 증명해 냈다. 그 결과물이 내가 즐겨 보는 ‘Unplugged’ 공연 실황이다.

MTV Unplugged 공연 실황(1992)


  에릭이 마약과 술에 빠져 허덕이던 시절의 영상들은 너무 잘 보존되어 있어 보면서도 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술에 찌들어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배경으로 그는 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살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죽으면 술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술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한계란 게 없었어요. 마시고 또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어요.” 에릭 클랩튼 정도나 됐으니 이것도 록 스타 인생의 한 궤적이라 얼버무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타리스트로서의 능력과 경력 다 빼고 나면 볼 장 다 본 알콜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술을 ‘죽기를 각오하고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자살하면 술을 못 먹으니 죽지 않고 살아서 먹고 또 먹는다’는 경지는 에릭 클랩튼에게서 처음 보았다.  


  이 영화를 본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에릭 클랩튼이 술에 만취해 게슴츠레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고 있는 눈빛이 생생하다. 술에 푹 절여진 눈빛만큼은 왠지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들이 붓고, 마셨다 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성미라 술자리에서 만취한 나 역시 이 세상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을 것이다. 알콜중독자 시절 에릭의 눈빛이 그랬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시절 록 스타란 이들의 삶이 술, 마약, 섹스, 온갖 기행으로 빚어져 있다고는 하나, 확 타오르고 금세 사그라들 운명이 아닌 이상 평생을 생사 분간이 안 되는 눈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 3주 가까이 되었다. 10대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적지 않은 세월 적지 않은 양을 들이부어 왔더니 어느 순간부터 술이 주는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록 스타들에 비하면 나는 고작해야 술만 마실 뿐이고 그마저도 나의 일상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한량을 지향하는 내 삶에 윤활유가 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지내왔는데, 이 믿음은 희망사항으로 변질되어 갔다. 《작은책》 첫 연재 글에도 “친한 벗으로부터 ‘술로 흥하고 술로 망할 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술을 벗 중의 벗으로 삼아 틈만 나면 술자리를 벌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래를 했는데, 너무 이르게 시작한 탓인지 40대 초입에 이르러 ‘술로 망할’ 징조가 자주 나타나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이다.”라고 쓴 바 있듯이 술에 대한 긍정적 믿음은 이미 쇠락한 성터 담벼락처럼 무너진 터였다. 


  에릭 클랩튼이야 10대 시절부터 전설적인 록그룹 ‘야드 버즈(Yard Birds)’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재주를 타고났고, 당대 최고의 록 스타이자 싱어송라이터로서 부와 명성을 모두 거머쥐었으니 술독에 좀 빠져 산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는가만(그렇게 막 살아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나 같은 아마추어 로커야 술독에 빠져 살면 어디서 돈이 나오겠나, 누가 알아주길 하겠나. 술 퍼먹을 시간에 기타 연습이나 더 하는 게 낫지.


  공교롭게도 내일(8월 5일) 공연에서 에릭 클랩튼의 “Layla”를 연주한다. 곡은 좋지만, 충동의 파도와 중독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의 에릭 클랩튼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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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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