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베르니에서 만난 봄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봄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지베르니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한 동지들이었다.
"와, 정말 춥네." 딸아이가 몸을 움츠렸다.
두꺼운 봄옷을 입었는데도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스카프 두 개를 목에 꽁꽁 감았지만 여전히 덜덜덜 떨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젊은 아가씨들은 봄이 활짝 핀 듯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저렇게 입고 안 추울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슬쩍 곁눈질했다.
역 밖에서 대형 셔틀버스 세 대가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인당 10유로. 20유로를 내고 버스에 올랐다. 관광 열차는 15유로지만 날씨가 너무 쌀쌀해서 대부분 버스를 선택했다. 관광 열차라면 지베르니 곳곳을 둘러볼 수 있어 더 재미있을 텐데, 추위에는 장사가 없었다.
버스는 직선코스로 쏜살같이 달려 30분도 안 돼 모네의 집 근처 주차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설렘이 가슴을 두드렸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이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길 양옆으로 짙푸른 나무들과 이름 모를 크고 작은 꽃들이 반겨주었다.
"엄마, 여기 진짜 예쁘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어떤 집은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가꾼 듯 꽃과 나무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모네의 집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가는 길 곳곳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다가 멈추고, 사진 찍고, 또 가다가 멈추고. "더 가야 해, 정원에서 더 많이 찍을 거야"라고 다독이면서도 결국 또 멈춰 서서 카메라를 들었다.
"거기서 봐, 여기는 꼭 찍어야 돼!"
딸아이를 모델 삼아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담고 싶은 풍경이 너무 많았다.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길가의 식당과 카페, 기념품샵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쌀쌀한 기운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다 보니 드디어 모네의 집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벌써 긴 줄이 서 있었다. 사진 찍느라 늦게 도착해서 꽤 뒤쪽에 서게 되었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유럽인들, 프랑스인들, 중국인, 일본인, 히잡을 쓴 아랍인들, 인도인들,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한국어까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모네를 만나러 왔다니.
한참을 기다린 후 드디어 입장했다. 성인 12유로, 학생 6.5유로. 18.5유로를 내고 들어간 순간, 추위에 떨었던 몸을 녹이고 싶어 기념품샵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네 관련 책들과 상품들을 천천히 살피며 밖에 햇빛이 가득 비치기를 기다렸다.
5월의 따스한 햇살과 늦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번갈아 찾아왔다. 기념품샵에서 한참을 보내고 나니 정원 쪽에서 강한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이제 따뜻해졌나 보다. 정원으로 가자!"
소파에 푹 기대어 있던 딸을 불러 정원을 향해 걸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미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지만, 예전과 달리 녹색 체인으로 출입을 제한한 곳들이 많았다. 그래도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은 사방천지에 널려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어여쁜 정원. 다양한 꽃들과 나무들이 마음과 시선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정신없이 행복함 속에 잠기게 했다. 모네의 정원에서 사진을 찍으면 영화나 소설 속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몸이 차가움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많이 춥다. 모네의 집으로 들어가자. 몸 좀 녹이고 다시 나오면 12시쯤엔 따뜻해질 거야."
집으로 들어가는 곳에도 끝없는 줄이 이어졌다. 한참을 기다린 후 서서히 들어갔다. 1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림의 위치, 물건의 위치까지 똑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의 온기 덕분인지 제법 따뜻했다.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퍼지면서 굳었던 몸이 풀어졌다. 두꺼운 겉옷과 스카프 두 개를 벗고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천천히 둘러봤다.
1년 전에 놓쳤던 부분들이 새롭게 시선에 들어왔다. 모네의 두 아들 모습, 가족사진들, 입양한 딸이 결혼 후 살았던 침실, 유난히 많은 일본 그림들. 모네가 일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다시 보고 싶었던 노란색 주방!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진 주방과 식당이 더욱 귀엽고 환하고 예뻤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8식구가 살았으니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겠지 싶을 만큼 크고 넓은 식탁. 동화 속에 온 듯한 기분에 딸과 함께 다양한 포즈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오후 12시쯤보다 2배나 많은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기 줄이 2줄, 3줄로 늘어날 정도였다. 초록색 계단에 서서 집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니 장미꽃과 초록잎사귀 덩굴로 가득한 액자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중세 유럽의 우아한 부인들 같은 포즈를 잡고 연거푸 사진을 찍었다.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계속 간직하고 싶을 만큼 예쁜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