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감성을 찾아 떠난 산책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풍경
21도의 완벽한 날씨가 나를 밖으로 이끌어냈다. 프랑스의 축제일이라 더욱 여유로운 마음으로 평소처럼 산책을 나섰다. 매일 걷기를 실천하는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방센느 공원을 향했다. 어제 방문했을 때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기대하며 공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입구에서부터 좌우 잔디밭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 길을 오가는 사람들, 여럿이 한데 어울려 앉아 있는 무리들까지.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공휴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싶어 일단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머나 맙소사!" 내 눈이 향하는 곳 어디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이미 스무 척이 넘는 보트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연인끼리,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보트를 타고 노를 저으며 각자만의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잔디밭은 말 그대로 만원이었다. 곳곳에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대화 소리, 음악 소리가 어우러져 공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축제장처럼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딸과 함께 가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놀이공원이 오늘 드디어 활짝 개장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개장 준비를 하더니, 마침내 오늘 문을 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지나다니며 눈으로만 감상했던 곳, 호기심만 간직하고 있던 그 곳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몸 수색을 받고 듬뿍 기대감을 안고 들어갔다.
"와!" 입이 쩍 벌어졌다. 놀이공원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상상했던 디즈니랜드만큼 크고 넓었다. 왔던 길이 어디인지 잃을 정도로 광활했다. 모든 놀이기구가 이곳에 다 모여 있는 듯했다. 입구 1번으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길을 헤매는 바람에 그 반대편인 입구 8번으로 나와버릴 정도였다.
수많은 인파 사이를 지나가며 놀이기구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기구를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소리,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놀이기구에 와서 즐기세요!"라고 외치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 아이들의 신나는 웃음소리가 공원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지나가는 곳마다 풍기는 음식 냄새들이 자동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달콤한 솜사탕과 팝콘 냄새, 갓 구운 와플의 고소한 향기, 매콤달콤한 크레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식욕을 끌어당기는 이 모든 냄새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놀이공원이든, 방센느 숲속이든, 호숫가든, 잔디밭이든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행복함과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즐거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지?"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이었다. 나는 지금 파리에 있다. 파리는 분명 프랑스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학창시절에 배우고 알았던 유럽사람들의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
마치 소위 '인종전시회'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다문화, 다인종의 도시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유럽이 아닌 때로는 아프리카에 온 것 같고, 때로는 전에 내가 살았던 아랍어를 사용하는 중동의 세계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금발과 하얀 피부를 가진 유럽인들이 사는 파리가 아니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계 프랑스인들, 갈색 피부의 아랍과 중동계 프랑스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 지금의 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럽 파리에 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프리카계 파리에 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전에 살았던 튀니지처럼 아랍계 파리에 와 있는 것인지 정말 헷갈리고 혼란스러웠다.
파리는 다양한 인종들의 집합 장소 같은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모든 인종이 서로 섞이고 섞여서 새로운 인종이 끊임없이 탄생하는 곳, 그것이 바로 지금의 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웠던 '3인종'이라는 단어로는 더 이상 분류할 수 없는 인종들이 만들어진 세계, 그런 세상이 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곳이 바로 파리가 아닌가 싶었다.
공원 잔디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정말 다양했다. 백인과 백인, 백인과 흑인, 백인과 황인, 흑인과 흑인, 흑인과 황인, 황인과 황인 등 3인종에서 6인종으로, 아니 유전학적으로 더욱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종들이 형성된 곳이 바로 이곳 파리의 모습이었다.
누가 이곳 파리를 학창시절에 배웠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그 파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패션의 고장, 늘씬한 금발 미녀가 거리를 활보하는 파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늘씬한 금발 미녀 프랑스 사람들을 파리에서 보는 것은 파리 하늘에서 밤에 별을 보는 것처럼 드문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탄다. 파리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승객의 70% 이상은 유색인종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다양한 인종들의 풍경을, 환경을 자주 접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프랑스 네이티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파리가 유럽사람들이 아닌, 다양한 인종들이 섞인 도시로 조금씩 달라져 가는 것이 어떠신지 말이다. 파리가 유럽사람이 아닌, 소위 프랑스 파리 시민이라고 불렸던 유럽계 사람들이 아닌 다양하게 섞인 인종으로 채워져 가는 것에 대해서, 아니 오히려 아프리카 흑인계 파리 시민들, 아랍계 갈색 피부의 파리 시민들이 더 많아진 것에 대해서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실상 나도 이 땅에서 황인종계 이방인으로서 살아가기에 할 말은 없다. 내가 파리를 사랑한 것은 파리의 아름답고 예쁜 주변 환경과 자연환경, 건축물들, 그리고 수많은 아름다운 유적지들이 좋아서 파리를, 프랑스를 사랑하고 머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진실에 가깝다면, 파리에 살면서 유럽의 감성을 느끼고 싶었다. 유럽사람들이 풍기는 유럽 문화의 느낌, 그들만의 문화, 그들만이 만들어내는 감성들을 느끼고 알고 싶었던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거의 9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에 아랍계 사람들의 문화와 감성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순수한 유럽계 문화의 감성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파리는 유럽과 아랍계, 거기에 아프리카계까지 섞인 제4인종계의 문화와 감성이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내가 기대했던 순수한 유럽 문화도, 익숙한 아랍 문화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였다.
오늘 방센느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다양하게 혼열되고 섞인 사람들을 보면서 기쁨과 즐거움, 재미와 흥미보다는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더 많이 느끼는 내 마음은 왜 이럴까?
나는 아직 세상의 다양성에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점차 한국도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프랑스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점차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만들어온 세계를 무너뜨리고 굳게 잠근 문을 여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고백하고 싶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 내가 기대했던 유럽에 대한 환상, 내가 알고 있던 문화에 대한 편견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방센느 공원에서 모든 인종을 다 만나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앞으로 내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설령 바뀌지 않을지라도, 바뀌어가는 세상의 물결 속에서 내 생각도, 내 가치관도 점차 그 흐름을 따라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변화를 거부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나 자신을 적응시켜 나갈 것인가가 나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다. 방센느 공원의 다채로운 풍경이 내게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