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문이 삐걱 열리자 차가운 산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찬 공기와 함께 솔향이 코를 찔렀다. 아인드리함 산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미 내린 관광객들과 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웅성거렸다. 산 봉우리를 올려다본 순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눈이 군데군데 덮인 봉우리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다.
"와아아! 눈이다! 진짜 눈이야!"
학생들이 터뜨린 탄성이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사막의 나라 튀니지에서 눈을 본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이들처럼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설렜다.
깊숙이 들이마신 공기는 폐 속까지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튀니지 시내의 공기도 깨끗하지만, 산에서 마신 공기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온몸이 상쾌해졌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온몸을 감쌌다.
고향의 거대한 산맥과는 다른 매력이었다. 부드러운 구릉지 능선이 물결처럼 끝없이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로 작은 마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가이드가 손짓하며 폭포 쪽을 가리켰다. 버스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폭포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조심해요! 미끄러워요!"
누군가 외치자 모두가 긴장했다. 경사진 돌길이 이끼로 미끄덩거렸다. 한 발 잘못 디디면 굴러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산길이었다.
"선생님, 손 잡으세요!"
평소 조용했던 남학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거친 손바닥이 내 손을 꽉 잡았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었다. 발 아래 자갈들이 굴러가며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냈다.
뒤에서 키 큰 여학생이 미끄러질 뻔한 나를 재빨리 붙잡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학생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20분쯤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드디어 폭포 소리가 들렸다. '졸졸졸' 떨어지는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와! 드디어 도착했다!"
작은 폭포였지만 학생들에겐 나이아가라 폭포나 다름없었다. 2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히며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꺄악! 시원해!"
누군가 물보라를 맞으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학생들이 폭포 주변으로 몰려들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셔터 소리가 '찰칵찰칵' 연달아 터졌다.
"선생님 덕분에 이런 곳까지 올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한 학생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작은 폭포가 주는 경치보다도 학생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더 아름다웠다.
'내가 이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구나.'
한국어 교사로서 느끼는 보람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평생 간직할 소중한 순간이었다.
30분쯤 폭포에서 시간을 보낸 후, 패키지 여행사 직원의 호각 소리가 '삐익삐익' 울렸다. 올라갈 시간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이끌어주며 흙투성이가 될까 봐 조심조심 산 위로 올랐다.
폭포 구경을 마치자 드디어 기다리던 자유시간이 시작됐다. 가이드가 집합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자 모두가 배를 움켜잡았다.
"꼬르륵" 누군가 배에서 나는 소리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는 학생이 미리 검색해둔 맛집으로 향했다. 띄엄띄엄 설치된 나무 그늘 아래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전통 음식을 파는 작은 매점들이 보였다.
버스에서 가져온 김밥 도시락은 이미 텅 비었고, 학생들이 준비한 쿠스쿠스와 브릭 같은 튀니지 전통음식도 반 이상 사라진 상태였다.
푸른 잔디밭에 둘러앉아 남은 음식을 나눠 먹었다. 2-3시간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온 데다 폭포까지 힘들게 다녀왔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음~ 맛있어!"
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학생들이 "맵다, 맵다" 하면서도 계속 젓가락을 움직였다. 고춧가루 때문에 빨갛게 된 입술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이 귀여웠다.
배고픈 상태에서 먹는 음식은 정말 꿀맛이었다. 단순한 김밥도 5성급 호텔 요리처럼 맛있게 느껴졌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 학생들과 함께 눈을 찾아 나섰다. 산악지대 마을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불어와 아랍어에 서툰 나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 하지만 몸짓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Neige! Snow! 눈!"
누군가 외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흙과 뒤섞인 더러운 눈이었지만 학생들에겐 보물 같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차가운 눈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 차가워!"
손가락 끝이 얼얼해지는 추위를 느끼며 모두가 킥킥거렸다. 눈덩이를 만들어 서로에게 던지며 눈싸움을 벌였다.
"맞았다!" "피해!"
웃음소리와 비명이 뒤섞였다. 조그만 눈사람도 만들어 그 앞에서 'V' 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구릉성 산지 꼭대기에 올라서자 숨 막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아래쪽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빨간 기와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와, 진짜 알프스 같아!"
학생 한 명이 감탄하며 외쳤다. 뾰족한 산봉우리와 하얀 눈을 배경 삼아 열심히 셀카를 찍었다. 스마트폰 카메라 소리가 '찰칵찰칵' 쉴 새 없이 울렸다.
끼가 많은 학생들은 튀니지 전통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된 애절한 멜로디가 산 위에 울려 퍼졌다.
"아하바크 툰시야~ (튀니지를 사랑해)"
이어서 K-pop 노래도 나왔다.
"Gangnam Style!"
싸이의 말춤을 추며 깔깔거렸다. 어설픈 춤사위지만 즐거움만큼은 최고였다.
학생들은 언제나 나와 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서툰 영어와 제스처로 대화했지만 마음은 충분히 통했다.
'어떻게 이 아이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해줄 수 있을까?'
고마우면서도 더 잘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Teacher, thirsty?" (선생님, 목마르세요?)
한 학생이 차가운 생수병을 내밀었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갈증이 해결됐다.
"Hungry? Food?" (배고프세요? 음식?)
다른 학생이 작은 과자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Teacher like this?" (선생님 이거 좋아하세요?)
전통 공예품 가게 앞에서 은색 팔찌를 들어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매 순간 나를 살피고 뭔가 해주려는 학생들의 마음이 전해졌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Teacher, present!" (선생님, 선물이에요!)
작은 기념품과 전통 과자들이 하나둘 내 가방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도시락으로 가득했던 가방이 다시 학생들의 선물로 무거워졌다.
진심과 애정이 담긴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뜨거운 감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튀니지에 있는 동안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가르쳐서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꼭 1등 시키자!'
내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바로 그토록 꿈꾸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여러분,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요. 선생님이 끝까지 도와줄 테니까 꼭 말하기 대회에서 1등 해서 한국에 가세요!"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선생님! 꼭 열심히 할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학생들의 대답이 산골짜기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왔다. 대화를 나누며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산길을 걸으며 보낸 시간이 아쉬웠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사진 찍어주세요!"
지나가던 관광객에게 부탁해 아인드리함 산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2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두 한 프레임에 들어간 완벽한 사진이었다.
'찰칵!'
셔터가 눌리는 순간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눈물겨운 기념촬영을 마치고 패키지 여행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슴 한편이 뭉클하고 따뜻했다. 오늘 하루가 평생 잊지 못할 보물 같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학생들과 함께한 이 특별한 순간들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