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떨림과 성장 사이
6월 21일, 파리의 오후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던 그날. 내 심장은 마치 피아노의 트레몰로처럼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작년 9월부터 오늘까지, 무려 8개월 동안 준비해온 피아노 실기시험 날 말이다.
매일 아침, 작은 전자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던 그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최소 5분이라도 연습하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모습. 때로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같은 구절을 수십 번 반복하며 끙끙거렸던 날들도, 어느새 곡이 술술 흘러나와 혼자 미소 지었던 순간들도 모두 소중한 기억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가 귓가에 맴돌았다. "잘 하실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동안 정말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자신 있었다. 두 곡 모두 이제는 눈을 감고도 칠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었으니까.
오후 4시까지 집에서 마지막 연습을 마쳤다. 완벽했다. 손가락들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멜로디는 마치 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제 정말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속으로 다짐하며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번째 환승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10분, 15분, 20분...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고, 내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뭔가 이상했다. 파리의 교통이 아무리 예측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사방팔방 안내문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작은 공지사항. 그 한 줄의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마치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오늘 이 노선은 운행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나!" 속으로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목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 7분 거리에 다른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구글 지도의 '7분'은 실제로는 '10분 이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마침 버스가 보였다. 얼른 올라타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빨리 가줘!' 하지만 급한 마음과는 반대로 버스는 유유자적 거북이 걸음으로 파리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빨간 신호등마다 길게 정차하고, 승객들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5시 40분이 넘어갔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정류장에서 뛰어내린 나는 파리 시민들의 놀란 시선을 받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뛰고, 빨리 걷고, 또 뛰고... 평소 느긋하게 산책하듯 걷는 파리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마치 시간에 쫓기는 이상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들의 시선보다 내 시험이 더 중요했으니까.
횡단보도에서도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후다닥 뛰어갔다.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8개월의 준비가 교통 때문에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음악학교 건물이 보였다. 5시 55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일단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른 학생들이 계단에 앉아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아직 다른 학생들의 시험이 진행 중이었다.
'아, 맞다. 여기는 파리구나.' 한국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나는 깜빡 잊었다. 6시라고 해서 정확히 6시에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여유 있게 기다리는 시간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딸이 가져온 악보를 받아들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5명의 심사위원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그토록 친숙했던 피아노 건반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보이지가 않았다. 떨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두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첫 음을 누르는 순간... 틀렸다. 집에서 수백 번 연습했던 그 곡이, 내 손에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그 멜로디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전자피아노와 그랜드피아노의 건반 위치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계속 연주했다. 하지만 실수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평소 자신 있게 넘어갔던 구간에서 손가락이 엉뚱한 건반을 눌렀고, 외웠다고 생각했던 멜로디가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두 번째 곡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그토록 완벽했던 연주가 여기서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절망스러웠지만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 울고 싶었다. 8개월의 준비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딸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잘했어요, 엄마!" 하지만 내 마음은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는데, 정작 무대에서는 제대로 된 연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다른 학생들의 연주를 듣는 둥 마는 둥, 마음은 이미 체념 상태였다. 어떤 학생은 손발을 덜덜 떨면서도 완벽하게 연주했고, 어떤 학생은 처음엔 긴장했지만 금세 자신을 찾아 청중을 사로잡는 연주를 선보였다. 나와는 너무 달랐다.
드디어 결과 발표 시간. 심사위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우 훌륭해요", "잘했어요", "노력이 필요해요"...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잘했어요!"
통과였다.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실수를 했는데도 말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 완벽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는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음악학교 바로 옆에 있는 몽소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이론 수업을 받을 때마다 들르던 곳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이 아름다운 공원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었다.
몽소공원은 파리 8구에 자리한 도시 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등장했던 이곳은 로마 시대 신전을 연상시키는 반원형 석조 건물과 잔잔한 연못, 그리고 사방으로 늘어진 아름다운 버드나무들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이다.
오늘도 이곳에는 각자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파리 시민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뛰어놀고, 연인들은 벤치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어르신들은 책을 읽으며 따스한 봄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버드나무가 축 늘어진 호숫가에 앉아 물결을 바라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나를 몰아세운 건 아닐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으며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나는 점점 밝아지는 마음을 느꼈다.
'그래, 이번이 첫 번째 실기시험이었잖아. 처음이니까 떨렸던 거야. 그리고 적어도 "노력이 필요해요"가 아니라 "잘했어요"를 받았잖아!' 스스로를 위로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년에는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경험으로 무대에서의 긴장감도 알게 되었고, 그랜드피아노와 전자피아노의 차이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다음을 위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오늘 피아노 실기시험을 봤어요. 많이 떨어서 실수를 했지만, 통과했어요! 그리고 내년에는 "매우 훌륭해요"를 받을 거예요!'
해가 서서히 지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내년에는 더 열심히 연습하고, 더 자신 있게 무대에 서겠다고.
버스에 올라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비록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성과를 이뤄낸 하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때로는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교통 체증, 긴장감, 익숙하지 않은 환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계획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순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실수를 했어도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는 것, 비록 완벽하지 않았지만 8개월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다음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진짜 성장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다. 때로는 떨리고,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나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당신도 지금 어떤 무대에 서 있나요? 떨린다면 떨려도 괜찮습니다. 실수한다면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연주를 마치는 것, 그리고 다음 무대를 위해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당신의 연주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