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의 시간을 걷다
부산에서의 아쉬운 일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2시간 30분의 달콤한 여정을 거쳐 경주에 발을 디뎠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점점 고즈넉해지면서, 마음 한켠에서는 이미 천년 고도의 향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와아~"
숙소 문을 열자마자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경주 시청 근처에 자리한 이 에어비앤비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발걸음을 들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우리는 모두 멈춰 섰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원목 가구들, 폭신폭신한 침구류,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공간이었다. 특히 주방은 정말 예술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 깔끔하게 정리된 시설들을 보니, 괜히 요리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여기 또 오고 싶다!"
벌써부터 재방문 의지가 불타오르는 걸 보니, 이곳은 정말 특별한 곳이 틀림없었다.
짐을 후다닥 풀고 우리가 향한 곳은 걸어서 15분 거리의 대릉원.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커다란 고분들이 동글동글 언덕처럼 펼쳐진 모습에 "오오~"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천마총은 정말 압권이었다.
1973년, 고고학자들이 천마총을 발굴할 때의 그 순간을 상상해보라. 흙먼지를 털어내며 나타난 화려한 금관, 반짝반짝 빛나는 금제 허리띠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압도한 건 바로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였다.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천마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발굴 당시 고고학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고 한다. 무려 1,500년 전 그림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총 11,297점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천마총은 그야말로 신라 왕실의 타임캡슐이었다.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 같은 기분이랄까?
"배고프다, 뭐좀 먹을까?!"
전주 한옥마을 같은 분위기의 황리단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첨성대, 대릉원, 안압지를 도보로 다닐 수 있는 이 완벽한 위치에 자리한 황리단길은 그야말로 경주의 핫플레이스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예쁜 한옥들, 그 사이사이 숨어 있는 감성 카페들. 전통과 현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다니!
맛있는 음식으로 꾸르륵거리는 배를 달래며,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해가 뚝뚝 떨어지자 우리는 첨성대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첨성대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다.
선덕여왕이 만든 이 석조 건축물은 단순한 천문대가 아니었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로 쌓아 올린 27층 구조물. 숫자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27층은 신라 27대 왕을, 12층과 12층 사이의 창은 12개월을, 전체 돌의 수 365개는 1년을 상징한다니. 1,400년 전 신라인들의 수학적 사고가 이렇게 정교할 줄이야!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동궁과 월지(안압지)에 도착했다.
"헉!"
입이 떡 벌어졌다. 밤에 본 안압지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고즈넉한 누각들이 잔잔한 연못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 은은한 조명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이곳이 바로 676년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국위를 높이기 위해 만든 왕실의 파라다이스였구나. 1975년 발굴 때 연못 바닥에서 나무배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천 년 전 신라 왕족들이 이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931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벌였던 곳. 천년왕국 신라의 마지막 숨소리가 스며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밤 11시가 훌쩍 넘어서야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깨끗하고 세련된 공간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 정말 좋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차례차례 샤워를 마치고 나니,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내일 뭐 보러 갈까?" "일단 자자..."
내일의 일정을 궁금해하면서도, 우리는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첫날부터 이렇게 알찬 경주 여행이라니, 내일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