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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경주, 천년의 시간 속으로 떠난 마음여행

새벽 햇살과 함께 시작된 두 번째 이야기

by Selly 정

경주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은은한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며, 오늘 하루가 특별할 것임을 예감했어요. 이삭토스트의 고소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우리 가족은 설렘을 품고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아, 드디어..."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이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네요. 그때 그 소년의 눈에 비친 불국사는 하늘을 찌를 듯 웅장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마주한 이곳은 왠지 아담하고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세월이 우리에게 준 선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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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에서 만난 천년의 지혜

석가탑과 다보탑이 들려주는 이야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사각 울리는 자갈 소리.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석가탑과 다보탑의 장엄한 모습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어요.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신라 불교예술이 절정에 달한 8세기, 우리 조상들이 돌에 새긴 철학이었어요. 법화경의 깊은 사상이 탑 하나하나에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엄마, 저 탑들이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어?"

아이의 순진한 질문에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외국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석굴암, 동양 조각의 꽃

석굴암 본존불은 정말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일출을 정확히 바라보도록 설계된 그 자리에서, 부처님은 1,300년 동안 동해의 태양을 맞이해오셨어요.

자연 습도를 완벽히 조절하는 고대 과학기술이라니!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온몸이 전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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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와 분황사에서 느낀 시간의 무게

불국사를 나서며 문득 떠오른 곳, 황룡사지로 향했어요.

'어떻게 빼먹을 뻔했지?'


사라진 꿈, 남겨진 이야기

휑하니 비어있는 넓은 터에 서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어요.

"엄마, 여기가 정말 황룡사가 있던 곳 맞아요?. "와... 여기가 진짜 황룡사가 있던 곳이야?"

한때 80미터 높이의 9층 목탑이 하늘을 찌르며 서있던 이곳. 680년간 신라의 자부심이었던 이 거대한 사찰이 1238년 몽골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니...

넓디넓은 터만 남아있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워했어요. 그럴 만도 하죠. 지금은 텅 빈 들판 같은 이곳이 한때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니!

"자, 눈을 감고 상상해봐. 여기에 높이 80미터의 9층 목탑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단다."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어요. 80미터라니! 지금의 20층 건물 높이와 같다고 하니, 1,400년 전 신라인들의 웅대한 꿈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할 수 있었어요.


사라진 위대함 앞에서

황룡사는 신문왕 14년(694년)에 완성된 신라의 자부심이었어요. 몽골 침입 때 불타 사라지기까지 약 680년간 이곳을 지켜온 거대한 상징이었죠.

"엄마, 왜 없어졌어요?"

호기심가득한 질문에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전쟁의 참혹함, 문화재 소실의 아픔... 하지만 이렇게 빈 터에서라도 아이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찬란했던 꿈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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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안에서 펼쳐진 역사 이야기

황룡사지를 뒤로하고, 우리는 김유신의 묘를 향해 달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경주의 풍경을 바라보며, 저는 신나게 이야기꾼이 되어버렸어요.

"김유신이 어떻게 삼국을 통일했는지 알고 싶지?"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차 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화랑의 정신, 삼국통일의 꿈...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아, 공부는 정말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해두는 거구나' 싶었어요.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사를 모른다는 게 살짝 아쉬웠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의 목소리로 전해주는 우리 역사가 아이들에게는 가장 생생한 이야기가 되고 있었어요.


송화산 동쪽, 소나무 숲이 바스락바스락 속삭이는 그곳에서 우리는 김유신을 만났습니다.

지름 30미터의 원형 무덤 둘레를 따라 배치된 12지신상들이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서고 있었어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이 촘촘히 둘러싸인 모습은 왕릉급의 위엄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삼국통일의 영웅이 바로 여기 잠들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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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촌마을에서 만난 소소한 행복

마지막 코스로 들른 교촌마을. 신라시대 국학이 세워졌던 이곳은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이 있던 곳이에요.

고가(古家)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 마을에서 우리는 특별한 카페를 발견했습니다.


떡매가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

쿵! 쿵! 쿵!

카페 여주인이 떡매로 인절미를 찧는 모습에 지나던 외국인 관광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어요.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이 하나둘 카페 안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여주인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가 인상적이었어요. 관광객 중 한 초등학생을 불러 직접 떡매를 잡아보게 했을 때, 처음엔 수줍어하던 아이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신나게 방아를 찧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어요.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은 모두의 마음 속에 따뜻한 추억으로 새겨졌습니다.

인절미 팥빙수 한 스푼을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함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더위를 단숨에 날려버렸어요.


�️ 경주 최부자댁에서 배운 삶의 지혜

99칸 대저택이 품은 이야기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경주 최부자댁. 99칸의 웅장한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과 정갈한 마당을 보며, 우리 선조들의 건축 미학에 감탄이 절로 나왔어요. 외국의 유명한 성채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오히려 더 운치 있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의미

"부자가 삼대를 가지 못하지만, 선행을 베푼 가정은 오래간다"

최부자댁의 일화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진정한 나눔을 실천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로, 그리고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요.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옥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며, 엄마의 마음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 아쉬운 작별, 그리고 새로운 출발

만나지 못한 소중한 것들

시간이 부족해 방문하지 못한 곳들이 많았어요.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진덕여왕릉... 그리고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는 남산까지.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릉을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어요. 신라시대에 이미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선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잖아요.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쨍쨍 내리쬐는 무더위에 얼굴이 까맣게 타버릴 정도였지만, 우리는 행복했어요.

시원한 자동차 안으로 들어와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잠시 숨을 고를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시원함이란!


� 경주가 남긴 깊은 여운

경주는 정말 '지붕 없는 박물관'이었어요. 곳곳에 스며있는 신라시대의 흔적들을 제대로 느끼려면 적어도 2박 3일은 있어야겠더라고요.

짧은 일정으로 모든 것을 소화하려다 보니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들이 너무나 소중했어요.

아이들의 눈 속에서 반짝이던 호기심,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 그리고 가족이 함께 만들어낸 특별한 추억들...

다음엔 더 천천히, 더 깊이 있게 경주를 만나보고 싶어요


� 전주를 향한 설렘

"전주 콩나물 비빔밥을 향해서 고고씽!"

아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방글방글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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