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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 파리에서 가장 아늑한 미술관을 찾았다

오랑주리에서 보낸 평화로운 겨울 오후

by Selly 정

바람이 매서웠던 그 날, 센 강변을 따라 걷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곳이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지만, 그 옆에 조용히 자리한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1구, 콩코르드 광장과 튈르리 공원 사이에 숨어있는 이 작은 미술관은 마치 비밀스러운 보물상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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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선물한 평화의 순간들

2층에 올라가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춰야 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모네의 거대한 수련 연작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물어가던 프랑스에 모네가 평화의 상징으로 기증한 이 작품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타원형 공간을 둘러싼 8폭의 수련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지베르니의 연못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모네가 원했던 대로, 도시 한복판에서도 '평화로운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 그의 마지막 선물이 여전히 파리지앵들과 여행자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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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파리 예술가들의 이야기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폴 기욤과 도미니크 발터-기욤 컬렉션이 소장된 이곳에는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 피카소까지... 20세기 초 파리를 뜨겁게 달궜던 예술가들의 작품이 가득하다.

상인이자 수집가였던 폴 기욤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이 작품들은 현대 미술과 구상 미술의 만남, 그리고 서구와 비서구 예술의 조화를 보여준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 앞에서, 세잔의 〈사과와 비스킷〉 앞에서, 시간은 멈춘 듯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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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전시실의 작품들-폴 세잔, 폴 기욤 그리고 피에르 오거스트 르누와르의 작품]



소소하지만 특별한 배려들

11유로의 입장료(학생은 무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관람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휠체어로도 모든 공간을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각 층마다 설치된 히어링 루프, 무료 와이파이까지. 작은 미술관이지만 방문객을 향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1층 입구에서 무거운 가방을 맡기고, 지하 1층에서 잠시 화장실을 들른 후, 2층에서 모네의 수련에 빠져들고... 작은 공간이지만 알차게 구성된 동선이 자연스럽게 예술 여행을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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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내부 서점과 카페 공간 - 여유로운 분위기]


파리에서 만난 작은 행복

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그 오후.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걸었던 오랑주리 미술관. 루브르의 웅장함도 좋지만, 이렇게 아늑하고 친밀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명작들이 때로는 더 깊은 감동을 준다.

미술관을 나와 튈르리 공원을 거닐며 생각했다. 파리는 참 많은 얼굴을 가진 도시라고. 화려한 명소들 뒤에 숨어있는 이런 소중한 공간들이 진짜 파리의 매력이 아닐까.

오랑주리 미술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감동을 선사하는 곳. 파리를 찾는다면 꼭 한 번은 들러보시길. 모네의 수련이 당신에게도 평화로운 오후를 선물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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