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파리의 11월은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어둠이 재빨리 몰려온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려지듯,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고 거리의 가로등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 어스름한 시간, 나는 베르시 빌라주를 걷고 있었다.
사실 파리에서 밥 한 끼 먹으려 식당을 고르는 일은, 보석상 앞에 선 사람처럼 나를 망설이게 만든다. 미슐랭 별이 빛나는 고급 레스토랑부터 골목 구석의 소박한 비스트로까지, 선택지는 끝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화려한 미식보다는 프랑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그러니까 한국의 삼겹살집처럼 부담 없이 들어가 고기를 구워 먹는 그런 곳이 그리웠다.
'히포포타무스(HIPPOPOTAMUS)'.
거리에서 마주한 식당의 외관은 수수했다. 하마를 뜻하는 이 엉뚱한 이름만큼이나 평범해 보이는 외관.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불빛은 따뜻했지만, 밖에서 본 규모는 동네 카페만 했다. '아,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겠구나.' 나는 그렇게 짐작하며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내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마치 나니아 옷장 문을 연 것처럼, 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천장은 높고, 공간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놓인 수십 개의 테이블들, 그 사이를 누비는 서빙 직원들의 경쾌한 발걸음. 벽면을 장식한 빈티지한 포스터들과 우아한 목재 인테리어는 프랑스 브라스리 특유의 세련됨을 풍겼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속담이 식당에도 적용되는구나. 나는 속으로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후 여섯 시 반. 프랑스인들의 저녁 식사 시간치고는 이른 편이지만, 이미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족 단위 손님들, 친구들끼리 모여 앉은 젊은이들, 퇴근 후 하루의 피로를 풀러 온 듯한 중년 부부들. 각 테이블에서는 와인잔이 부딪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한 테이블에서는 꼬마 아이가 포크보다 큰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려 애쓰고 있었고, 옆 테이블의 노신사는 와인을 음미하듯 천천히 입술에 가져가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오늘 하루도 잘 견뎠어'라고 말하는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미슐랭 가이드북에 나오는 특별한 저녁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의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히포포타무스는 1968년, 파리의 심장부인 샹젤리제 근처에서 첫 발을 뗐다. 당시는 프랑스가 격동의 68혁명을 겪던 해. 그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음식과 따뜻한 식탁을 원했고, 이 스테이크하우스는 그 갈망에 답했다.
'프랑스식 스테이크하우스'를 표방한 이곳은, 미국식 스테이크하우스의 시원시원함과 프랑스 브라스리의 우아함을 절묘하게 섞어냈다. 이제는 프랑스 전역에, 심지어 해외에까지 지점을 둔 성공한 체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첫 가게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뉴판을 펼치자 눈이 즐거웠다. 다양한 부위의 스테이크들이 사진과 함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등심, 안심, 립아이... 각각의 이름 옆에는 추천 굽기 정도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등심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주문했다. 치즈 감자를 사이드로 선택했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든 테이블에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떤 접시 위에서는 아직도 육즙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고, 칼을 댄 단면에서는 완벽한 핑크빛이 드러났다. 파리의 저녁 공기는 고기 굽는 향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접시가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접시 위의 스테이크는 마치 예술 작품 같았다. 겉은 카라멜처럼 고소하게 구워져 갈색 결정이 반짝였고, 칼을 대자 속살은 장미빛으로 부드럽게 벌어졌다. 한 입 베어 물자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씹을수록 고기 본연의 깊은 맛이 혀를 감쌌다.
치즈 감자는 또 어떤가. 크리미한 치즈가 뜨거운 감자와 만나 녹아내리는 순간의 그 행복이란. 고기의 강렬함과 감자의 부드러움이 입안에서 왈츠를 추는 듯했다.
옆 테이블 손님이 주문한 버거도 인상적이었다. 두 손으로 겨우 쥘 수 있을 만큼 두툼한 그 버거는, 패티에서 흘러내리는 육즙 때문에 종이 냅킨이 금세 젖어버릴 정도였다. 신선한 양상추와 토마토, 양파가 패티 위에 겹겹이 쌓여 있고, 그 위를 폭신한 브리오슈 번이 살포시 덮고 있었다.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이 정도 퀄리티의 스테이크를, 이런 분위기의 식당에서, 이렇게 합리적인 가격에 먹을 수 있다니. 파리에서 외식비는 늘 마음의 짐이었는데, 히포포타무스는 그 무게를 덜어주었다. 고급스러움과 접근성을 동시에 잡은 것, 어쩌면 이것이 50년 넘게 사랑받아온 비결이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11월의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하지만 배는 든든하고 마음은 따뜻했다.
오십 대에 파리로 유학을 온 나에게, 이곳에서의 매 순간은 배움이다. 오늘 배운 것은 이것이다. 프랑스의 일상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는 것. 동네 스테이크하우스에서 가족들과 둘러앉아 고기를 나눠 먹는, 그 평범하고도 소중한 시간 속에 진짜 프랑스가 있다는 것을.
히포포타무스. 하마처럼 느릿하지만 묵직한 만족을 주는 곳. 고기를 좋아한다면, 파리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면, 이곳의 문을 두드려보시길. 외관에 속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시길.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따뜻하고 풍성한 세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