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에서 만난 작은 행복
9월 중순을 향해가는 파리(Paris)는 참 변덕스러워요. 어제는 봄날처럼 포근했는데, 오늘은 10도까지 뚝 떨어져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어야 했거든요. 톡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밤새 들리더니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곤해요. 파리의 가을과 겨울은 원래 이런 법이에요. 그래서 저는 항상 작은 접이식 우산을 가방 한 켠에 넣어둬요. 요즘 나온 양산 겸 우산은 정말 고마운 존재거든요.
오늘은 친구와 함께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으로 향했어요. 집에서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슝 달려서 슈망 베르(Chemin Vert) 역에서 내렸죠. 역에서 나와 8분 정도 걸으면 나타나는 이 광장은 제가 몇 번이고 찾는, 아담하고 예쁜 보석 같은 곳이에요. 피카소 미술관과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이 있는 이 동네는 볼거리가 참 많답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 때문에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요! 가족 단위, 연인들, 친구들이 우산을 받치고 광장을 거닐고 있었어요.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공원에는 분수가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루이 13세(Louis XIII)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어요. 굵직한 가지를 자랑하는 오래된 나무들 사이사이 벤치에는 책을 읽는 파리지앵들이 앉아있고,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답니다.
광장을 둘러싼 상점들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어요. 세련된 가방 가게, 반짝이는 액세서리 숍, 보석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오늘은 유난히 갤러리들이 제 발걸음을 붙잡더라고요. 과감하고 강렬한 원색의 유화 작품들, 구리와 철로 만든 조각품들이 빗방울 사이로 반짝거렸거든요.
친구와 저는 잠깐 벤치에 앉아 비 오는 광장의 운치를 만끽했어요. 혼자 온 관광객이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힘겹게 셀카를 찍는 모습을 보며 "가서 도와줄까?" 하고 속닥이며 웃기도 했죠. 한 바퀴 빙 돌아본 후, 저희는 빅토르 위고 카페로 들어갔어요.
10도의 쌀쌀한 날씨에 몸을 녹일 겸 카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파리 사람들은 참 신기해요. 이런 날씨에도 밖에 앉아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요. "파리에 있으니 파리지앵처럼 해보자!" 저희도 밖 테라스(terrasse)에 자리를 잡았어요. 살짝 오들오들 떨렸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보주 광장은 또 다른 감성을 선사했답니다. 마치 우산을 받쳐 들고 울창한 숲속을 거니는 듯한, 나 홀로 비 오는 숲에서 캠핑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웨이브진 갈색 머리의 잘생긴 웨이터가 기분 좋은 미소로 뜨거운 카페 라테(café au lait)와 카푸치노를 가져다주었죠. 두 손을 비비며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6-7유로 커피 한 잔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줬어요. 친구와 저는 파리지앵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를 떨며 오랜 티타임을 가졌답니다.
갑자기 저 멀리서 시끌벌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디서 이런 종달새 같은 소리가? 둘러보니 형광 조끼를 입은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거든요. 아이들의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조용히 잠들어 있던 광장이 기지개를 펴며 깨어나는 것 같았어요. 카페에 앉아 있던 어른들 모두가 아이들을 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참 신기해요. 제 아이를 키울 때는 왜 그리 힘들었는지, 그런데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면 어쩜 그리 사랑스러울까요. 친구와 저는 한참 동안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있다가, 자연스레 우리 아이들 키우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어요. "힘들었지만 참 보람찬 시절이었지."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어." "인생이 긴 것 같아도 금방 지나가네." 허무하지는 않지만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웠답니다.
그런데 보주 광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곳은 1605년부터 1612년에 걸쳐 앙리 4세(Henri IV)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 광장이에요. 정사각형 모양의 광장 둘레로 36개의 건물이 대칭적으로 늘어서 있는데, 모두 붉은 벽돌과 하얀 석재로 만들어져서 통일감 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죠.
특히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1832년부터 1848년까지 16년간 살았던 6번지 집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과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를 이곳에서 집필했다고 하니,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꼭 방문해야 할 성지나 다름없답니다. 광장 아래로는 아케이드가 이어져 있어서 비 오는 날에도 쇼핑을 즐길 수 있어요. 골동품 가게, 아트 갤러리, 세련된 부티크들이 즐비하죠.
그렇게 충분한 티타임을 가진 후, 저희는 다시 메트로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에는 빅토르 위고의 집을 꼭 방문하기로 약속했거든요. 비 오는 오늘, 친구와 함께한 보주 광장 여행은 낭만을 충분히 느끼고 만끽한 하루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