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둘째의 경고
금요일 오후.
경자는 슈퍼마켓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이 줄어드는 시간대였다. 2시부터 3시까지. 하루 중 가장 한가한 시간.
휴게실은 좁았다.
직원 네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 낡은 탁자 하나. 플라스틱 의자 네 개. 벽에 붙은 작은 거울. 구석에 놓인 커피 자판기.
그게 전부였다.
창문도 없어서 환기가 안 됐다. 공기가 탁했다. 오래된 커피 냄새와 누군가 먹다 남긴 음식 냄새가 섞여 있었다.
경자는 탁자에 앉아 김밥 몇 조각을 먹었다.
편의점 김밥. 참치김밥.
아침에 도시락을 싸올 시간이 없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집에서 만든 게 더 맛있고 저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밥을 씹었다.
맛이 없었다. 밥이 퍼석했다. 단무지가 너무 달았다.
하지만 배가 고파서 먹었다. 점심을 거르면 오후에 힘들었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동전을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위잉.
종이컵이 떨어지는 소리. 커피가 나오는 소리.
뜨거운 커피.
플라스틱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뜨거웠다. 입술이 데였다.
호호 불어서 마셨다.
쓴맛. 자판기 커피 특유의 쓴맛.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냈다.
화면을 봤다.
둘째 아들 민수였다.
'민수가 왜?'
평소 같으면 전화 안 하는 시간이었다. 민수는 병원에서 약사로 일했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 금요일 오후. 바쁜 시간.
"여보세요?"
"엄마, 나 민수야."
"응, 왜? 무슨 일 있어? 일하는 시간 아니야?"
"잠깐 쉬는 시간이에요."
민수가 잠시 멈췄다.
"엄마, 저... 할 말이 있어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진지했다.
경자는 자세를 바로했다.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뜨거운 커피가 손가락에 묻었다. 뜨거웠지만 참았다. 손가락을 입으로 빨았다.
"형한테 들었어요."
민수가 말했다.
"부동산 투자 알아보신다면서요?"
'역시.'
경자는 한숨이 나올 뻔했다. 참았다.
큰아들이 둘째한테도 말했구나. 형제끼리 통화했구나.
"너희 형이 왜 그런 걸 다 말하고 다니는 거야..."
"엄마, 형이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민수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저도 걱정돼요."
"..."
경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진짜로 하실 거예요?"
민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둘째 아들은 큰아들보다 더 솔직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냥... 알아만 보는 거야."
"엄마."
민수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병원에 약사 선배님들 계시잖아요."
"응."
"그분들도... 뭐 제가 신입이라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민수는 말을 이었다.
"복도에서 전화 통화하시는 거 들으니까... 부동산 이야기 하시는 것 같던데, 요즘 좀 힘들어 보이시더라고요."
경자는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힘든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출 갚는 거 때문에... 힘들다고... 그런 이야기 하시는 걸 들었어요."
신입이라 선배들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복도에서 우연히 들은 것. 식당에서 선배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들은 것.
"매달 갚는 돈이..."
민수가 말을 멈췄다.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경자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얼마나?"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민수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님들이 점심 먹으러 가실 때 보면..."
"응."
"요즘 도시락 싸오시더라고요."
도시락.
그 단어가 경자의 가슴에 꽂혔다.
"커피도 예전에는 스타벅스 드셨는데 요즘은 자판기 커피..."
자판기 커피.
경자는 손에 들린 자판기 커피를 내려다봤다.
종이컵. 플라스틱 뚜껑. 미지근해진 커피.
'도시락... 자판기 커피...'
"그런데도 힘들다고 그래?"
"네... 정확히는 모르지만, 뭔가 어려워 보이시더라고요."
민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민수가 또 망설였다.
"한 분은 오피스텔인가 뭔가 그런 거 사셨는데..."
"응."
"임차인 구하기가 힘들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었어요."
경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임차인을 못 구해?"
"네...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엄마, 그런데..."
민수는 말을 멈췄다.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월급이...'
그 말을 하지 않아도 경자는 알았다.
"엄마, 정말 걱정돼요."
민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제가 잘은 모르지만, 지금 부동산이... 좀 그런 것 같아요."
"..."
"그리고 매달 갚는 돈도... 엄청 많을 것 같은데..."
"나는 괜찮아."
경자가 말을 끊었다.
"엄마가 계산 다 해봤어. 그리고 아빠도 있잖아."
"그래도요, 엄마."
민수가 계속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선배님들 보면... 뭔가 힘들어 보이세요."
"알았어. 엄마가 알아서 할게."
경자는 다시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엄마,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민수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아빠 퇴직금도 없으시잖아요. 외국계 회사라서..."
"알아."
경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엄마가 노후 준비를 하려는 거잖아."
"엄마..."
"됐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엄마가 알아서 할게."
"네... 그럼 몸 조심하세요."
전화를 끊었다.
경자는 한참을 커피잔을 들여다봤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김이 나지 않았다. 미지근했다.
표면에 기름막 같은 게 떠 있었다. 커피 자판기 커피 특유의 그 기름막.
맛이 없었다. 쓰기만 했다.
'약사 선배님도 힘들다고...'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임차인도 못 구한다고...'
'도시락 싸온다고...'
'자판기 커피 마신다고...'
경자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아갔다.
만약 내가 그렇게 된다면?
만약 임차인을 못 구한다면?
손이 떨렸다. 미세하게.
'아니야...'
경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이 있잖아. 남편이랑 합치면...'
다시 계산했다.
남편 월급. 내 월급. 합치면.
대출 갚고. 수진이 학비 주고. 생활비 주고.
남는 돈.
'빠듯하지만... 할 수 있어.'
경자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임차인 들어오면 문제없어.'
고개를 저었다.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양쪽으로.
아니야. 나는 다를 거야.
'민수가 뭘 알겠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겨우 신입인데. 대충 들은 소문일 거야. 복도에서 들은 거라고 했잖아.'
'여의도는 다르다고 했어. 조 소장님이 그랬어. 수요가 많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식어서 맛이 없었다. 쓰기만 했다.
하지만 마셨다. 목이 말랐다.
휴게실 시계를 봤다.
벽에 걸린 플라스틱 시계. 2시 10분.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경자는 일어났다.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직 조금 남았지만 버렸다. 맛이 없어서.
김밥 포장지도 버렸다.
비닐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거울을 봤다.
작은 거울. 벽에 붙은.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피곤해 보였다.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잠을 못 자서.
입술이 건조했다.
립밤을 발랐다. 가방에서 꺼내서. 작은 통. 돌려서 바르는 립밤.
'내일... 내일이면 실물을 본다...'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속으로.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다를 거야.'
'나는 준비했어. 공부했어.'
하지만 거울 속 얼굴은 불안해 보였다.
자신감 없어 보였다.
경자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문을 열었다.
매장으로 나갔다.
형광등 불빛. 손님들. 카트 소리. 바코드 찍는 소리.
일상.
계산대로 돌아갔다. 1번 계산대. 자신의 자리.
"어서 오세요."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하지만 머릿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임차인 못 구한다는 약사 선배.
도시락 싸온다는 약사 선배.
자판기 커피.
대출.
매달 갚는 돈.
그리고.
내일.
오후 2시.
여의도.
조영달.
실물.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였다.
손이 떨렸다.
바코드를 잘못 찍었다. 삑삑. 오류음.
다시 찍었다.
'진정해. 일단 보자. 보고 나서 생각하면 돼.'
하지만 경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아니, 결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퇴근 시간이 되었다. 6시.
경자는 유니폼을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방을 들고 슈퍼마켓을 나섰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10월 끝자락. 곧 11월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경자는 생각했다.
'내일... 내일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였다.
내일이면 그 집을 본다.
한강뷰를 본다.
10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을.
경자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그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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