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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경계

남편은 이해가 되는데, 아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by Selly 정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 이드리스 샤흐의 말이 떠올랐다.

"장맛은 혀에 한번 묻혀 보면 안다"라는 속담처럼 일부만 보아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지만, 아들의 행동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12월, 아들이 여자친구와 함께 파리에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는 참 귀엽고 예뻤다.

'아들도 결국 남자라 얼굴을 먼저 본 걸까?' 세상 모든 남자가 그렇듯,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일까? 궁금한 마음에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어디가 맘에 들었어?"

"그냥, 뭐,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 괜찮다고 생각했어."

역시나 센스 제로인 남편. 은근히 듣고 싶었던 말은 하지 않는다.

"됐어요. 그냥 아들이 여자친구 얼굴만 보고 골랐나 해서요."

다행히 아들의 여자친구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었다. 미국 영주권도 있고, 아들보다 월급도 많이 받는단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회계사무소에 다니는 실력자라고 한다. '다행히 보는 눈은 있네!'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문득 내 속물근성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 아들 가진 엄마들은 다 이럴까?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고, 그에 걸맞은 여자친구를 당연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예전에는 막장 드라마 속 시어머니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저리 속물일까? 왜 돈만 중요하게 여길까? 왜 자기 아들만 잘났다고 우기지? 가난한 며느리를 왜 그리 무시할까? 나도 대부분의 시청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며느리를 맞이할 시점이 되니, 그게 아니었다. 나도 그 막장 드라마 속 시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고상한 어머니 따위는 집어치워라'였다.

"내 아들이 얼마나 실력 있고 능력 있는데, 며느리의 심성이라도 고와야 하지 않을까? 특히나 요즘은 아들이 결혼하면 '남'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라는데,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그냥 넘겨줄 순 없잖아?"

적어도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특별한 고질병이 없으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아가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아들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들의 대답은 언제나 "우리보다 나으니까 걱정 마세요!"였다.

"낫다고? 어떻게?"라고 물어도 더 이상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엄마, 어쨌든 내 선택을 믿으세요!"였다.

남편도 구구절절 묻지 않았다. "둘이 알아서 잘 살겠지!"였다.

"나도 당신이 100% 완벽해서, 당신 집안이 100%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잖아. 그냥 당신 한 사람만 보고 결혼한 거지."

남편의 말은 오히려 내 속을 긁었다. 그때는 남편보다 내가 더 모든 환경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남편의 '가능성'만을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아주 탁월한 선택을 한 거예요!"라고 톡 쏘아 말했다.

남편의 선택은 이해가 잘 되었지만, 아들의 선택에 대한 나의 반응은 까다로웠다.


1주일간의 파리 여행이 시작됐다. 1년 전 아들이 파리에는 나를 방문했을 때는 나와 동행하며 보디가드처럼 곁을 지키던 아들이, 이번엔 그 모든 행동을 여자친구에게 쏟았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위험한 길에선 안쪽으로 걷게 하는 등 모든 행동이 여자친구를 향했다.

특히 눈에 거슬렸던 건, 휴게소에서 여자친구의 가방을 들고 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게 당연한 건데, 남편도 나를 위해 그렇게 했었는데, 아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니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꼴불견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그 모습이 싫었다.

내가 화장실 갈 때 둘째와 딸이 밖에서 기다리는 건 당연했다. 엄마니까, 내 자식들이니까. 그런데 왜 아들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남편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한데, 아들이 여자친구에게 똑같이 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진 않았지만, 추위에 떨고 있는 아들에게 "기다렸다 같이 들어와"라고 말하면서도 왜 마음속으론 기쁘지 않은 걸까? 잘한 행동인데 왜 칭찬이 나오지 않는 걸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묘한 감정이었다.


어느새 아들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어디를 가든 늘 여자친구 곁에 있었다. 대화를 좀 하고 싶어 이런저런 핑계로 아들을 불러봤지만, 아들은 눈치도 없이 여자친구와 어깨동무하고 팔짱을 끼고 다녔다. 내 곁엔 둘째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자꾸 큰아들의 행동에 시선이 갔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이틀 전, 나는 섭섭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너희가 계속 붙어 있으니 우리가 네 여자친구와 가까워질 시간이 없잖아.너희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만날 시간이 있지만, 우리는 이번이 기회였는데. 파리 관광만 하러 온 게 아니잖아."

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성숙하지 못했다며 사과했고, 이후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나는 아들의 예비 며느리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딸도 장차 새언니가 될 사람과 오손도손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7박 8일간의 파리 여행을 마치고 아들과 예비 며느리를 미국으로 다시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의 우울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딸은 초등학교 이후 미국으로 간 두 오빠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다른 집처럼 오빠들과 싸우기도 하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랫에 만난 오빠들이 1주일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니, 그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고 허할까? 이해가 되니 마음이 아팠다. 눈물 그렁그렁한 딸이 안쓰러웠다. 그날 딸과 나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싶어 영화관을 찾았다.

누군가는 아들이 장가간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휑하다고 하니' 주변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봤다. "뭐가 섭섭해요? 얼마나 좋아요. 홀가분하고 좋기만 하는데요"

친언니도 "둘이 잘 살게 내버려둬. 간섭하지 마!"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 이드리스 샤흐의 말처럼, 나는 아직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시어머니가 되고 아들을 장가보내고 나면 그들처럼 말할 수 있게 될까? 사뭇 궁금하다.

남편이 나에게 하는 모든 친절하고 다정한 행동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아들이 여자친구에게 하는 똑같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들을 가진 대부분의 엄마 마음이지 않을까? 나만 그런가? 내가 유난스러운것일까?

"이해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내 입장에서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듯 여자친구 입장에선 아들의 행동이 당연할 것이다.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인 행동일 뿐이다.

'이해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아들과 여자친구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니 예비 며느리가 사랑스러워졌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누군가의 시어머니가 되고, 장모가 된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 가족 간의 갈등도 줄어들지 않을까?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새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과 이해의 시작일 것이다.

이제 나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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