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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안 May 10. 2024

불행의 민감도




이제는 조금만 힘든 상황이 와도 금방 지친다. 아니 탈진해 버린다. 

조금만 흥분하면 온몸이 후들거리고 심장이 요동친다.

배가 조금만 아파도 호흡이 제대로 안된다. 


“ 난 왜 점점 더 예민해져 갈까? “

정말 힘든날은 엘리베이터만 타고 불안하다.

갑자기 추락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 예민함의 답을 정말 우연히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찾게 되었다. 



많은 불행을 한꺼번에 겪은 사람은 

조금만 자극에도 크게 반응한다. 

전문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그걸 불행민감도라고 부르기로 했다. 


불행민감도가 높은 사람은 조그만 자극도 견디기 힘들어한다. 

시각,청각,촉각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확대 해석한다. 

몸은 바로 긴장하거나 경직되고 비상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두근거리고 어지럽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느꼈던 갑자기 죽을 것 같은 그 느낌이 

몸에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을 겪든 극심한 고통의 수치로 올라갈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이다. 



최근 결혼관련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어제 오은영의 결혼지옥에 나온 부부는 잠귀부부였다.

잠자는 남편 귀에 경읽기 

하루에 20시간을 자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의 스토리였다.

맨날 잠만 자고 일도 안하는 남편이 얼마나 답답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남편의 사정을 알고 나서 나는 그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부부는 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빛이 14억이 넘었다. 

목장을 증축하면서 생기난 빛이었고 중간에 건설사기도 당하는 바람에 

예산보다 더 큰 돈이 들게 된 것이다. 


남편이 잠을 자는 이유도 신경무력증과 자율신경실조증으로 인해 먹는 약 때문이라고 했다.

오은영 박사님의 말로는 잠이 오게 하는 성분의 약은 2개 정도 들어가 있지만 

20시간을 자는건 약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남편은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잠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심장 두근거리고 아프다고 했는데 

스튜디오 에서는 오랜시간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에 패널들은 모두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스튜디오에는 조금의 희망이라도 묻어 있었기에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 영상속 예전 나의 모습도 있었고 현재의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또 나쁜일이 생길 것 같고 더 이상의 자극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궁지로 몰린 상태. 

내가 보기에 화면속 그 남편의 모습은 그것 이었다. 


나 역시 얼마나 높은 불행민감도를 가지고 사는지 알게 되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조금만 힘들면 다 포기하고 싶고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죽고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누구나 힘들면 고통스럽고 우울한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민감도가 높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몇배는 더 높을 것이다. 


마치 정신적 psdt를 느끼는 것과 같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이라고도 해아할까. 

불행의 민감도를 낮출 수 있는 많은 방법 그리고 훈련이 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도 한다. 

어제 방송에서 그 잠귀부부의 남편은 방송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새벽일도 열심히 한다는 후문으로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지만 

나는 그 남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견해가 아니라 냉정한 견해다. 

그리고 그 과정들이 어느정도 반복되어야 일터로 복귀할 수 있을 꺼라는 생각이다. 


스위치가 켜지듯 고통과 연결되는 상황 즉 스트레스에 계속 노출되거나 

돈에 대한 압박감이 커질 때 다시 주저앉을 수 있을꺼라는 생각도 든다. 


불행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한꺼번에 불행을 맞이한 자들은 온갖 지옥을 맛보며

전쟁을 겪어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은 막연한 지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 고통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삶을 포기하거나 잠만 자거나 은둔생활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서커스 단에 어릴 적부터 다리가 묶여 있던 코끼리가 

그 밧줄을 끊어낼 힘이 생겨도 끊어낼 생각조차 안하고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과 같다. 


나름대로 고통과 싸우며 살아왔지만 더 이상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학습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행복도 학습할 수 있다. 

불행의 민감도가 높아져 있다면 

행복의 민감도를 높여 상쇄시켜 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가끔 샤워를 하면서 숨이 막힐 듯 답답할 때가 있는데 

그럴때는 기분이 나빠지고 계속 그 답답한 상황에만 몰두가 된다.

그리고 씻다가도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오늘이 그랬다. 

“ 나가야 될 것 같은데 기운이 자꾸 빠지고 이상해. “ 

그리고 나를 관찰했다. 어지러운 것도 아니고 속이 매스꺼운 것도 없었다.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 기분이 나빠지고 있구나. 근데 그 더러운 기분이 나를 눅눅하게 하면 

내 건강까지 안좋아질 것 같은데? 깨끗하게 씻는건 기분이 좋은거 아닌가? 

천천히 머리를 감고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기분좋게 샤워를 마쳤다. 

행복의 민감도를 높이는 건 노력의 영역이다.

불행의 민감도는 이미 무의식으로 넘어와서 매순간 나를 쫓아다니는 수준이다.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너도 지치겠지. 

불행아. 불행히도 넌 나를 더 이상 흥분시키기 어려울 꺼야. 

정말 반응해야 할때와 아닐때를 내가 점점 구분하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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