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 조직에서 직급의 힘은 굉장히 크다고 많이들 생각을 합니다. 피라미드 구조의 특성상 담당하는 업무범위가 넓고 결정권한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직원들 중에는 상사가 직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근무평가나 성과급을 결정하는 건 직근상급자이니까 사실 승진이 가까운 직원들에게는 어느정도 맞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직급의 힘이 그 자체로 그렇게 큰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가끔 스스로를 농담처럼 '직급에 대한 존중심이 없는 사람'으로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처럼 존중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직급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조직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때 최종 결정권자는 사장에게 있습니다. 결국 조직 관리자 대부분의 권력은 사장의 의사결졍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와, 사장이 직접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덜 중요한 의사결정을 얼마나 본인 의사대로 할수 있는지, 그 두가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사장에게 관리자가 미치는 영향력에는 일정부분 직급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직급이 높을수록 사장과 대면기회가 많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그 사람이 업무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사장의 의중에 맞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조력할때입니다.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의사대로 최종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적인 조직이라면, 당연히 직급이 높을수록 넓은 시각에서 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직급은 있는데 업무를 아예 파악못하고 이상한 포인트에 꽂혀서 딴소리를 하는 간부들이 회사마다 한두명은 있을 것입니다. 더더구나 연공서열대로 승진하는 관행이 많은 공공부문은 이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심지어 인사부서에서는 고위간부들을 죽 나열해도 '실제로 일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입니다. 조직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비전과 실행의지가 부족하면 승진인사의 방향이 애매해지고, 그러다보면 직급의 권위가 무너지게 됩니다.
바꿔말하면 이런 상황에서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더라도 직급에 대한 욕심은 없을수도 있습니다. 권력을 '내가 의도한 대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라고 정의한다면, 굳이 직급이 아니더라도 업무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폐쇄적인 조직문화에서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조직이 답답하고 미래가 없어보이더라도 항상 명분을 바탕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리더가 종종 출몰하기도 하고, 그런 시기에 구성원들의 지지가 더해지는 경우도 많아서 낮은 직급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오기도 합니다. 좋은 조직이라면 그런 사람들의 직급을 올려주는 방법도 고민해야하고,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힘을 얻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