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내에 익명게시판이 있습니다. 익명이라는 편의성이 있으니 조금 더 솔직하고 아무 말이나 편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역시 그것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순기능이라면 구성원의 불만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인데요. 요새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글에 '일하지 말고 재테크에 올인하세요','돈벌어서 빨리 탈출하세요' 라고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거기에 그만하라고 만류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지만 지금도 마이웨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양상은 다르지만 한동안 MZ세대 직장인들의 화두였던 파이어족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 미국에서 유행했던 Quiet Quitting(조용한 퇴사)와도 맥을 같이 할텐데, 회사 내에서 성취에 목매달지 말고 그 시간을 활용해서 재테크에 집중하자, 빨리 목표한 금액을 달성해서 빨리 퇴사하자, 그런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2000년대 이후의 조직생활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주는 급여는 사실상 일정하게 향후 장기간 보장되며 노력에 대한 보상 차별이 거의 없는 반면, 그 시간을 활용해서 재테크에 올인하면 성과에 비례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전략적 사고의 결과이겠죠.
파이어족의 등장을 대부분 기성매체는 직장인들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겠죠.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세대의 경험에 따라서 당연히 가치관은 조금씩 다르고 추구하는 방향이나 견딜수 있는 고통,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다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에 파이어족이 등장하는 이유는, 앞세대에서 '삶의 의미'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직장생활이었던 반면, 지금 세대에게는 그 의미를 찾는 것이 훨씬 힘들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삶의 의미를 채워넣으면서, 그 의미의 최적화를 추구하면서 의사결정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가 전부야'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돈이나 명예가 전부는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아버지 세대에서는 직장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그 성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게 본인들의 삶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조롱하듯 얘기하는 '가족같은 회사'가 그런 의미겠죠. 그런데 평생직장이 무너지면서, 지난 2~30년간 이런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40~50대에 명퇴로 내몰리는 선배들을 보면서 회사는 그저 직원들을 이용하고 버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해졌죠. 제가 일하는 공공부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중견의 나이에 실직으로 내몰릴 정도는 아니지만, 조직이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는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죠. 그렇다면 지금 그런 회사에서 일을 하는 우리는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돈이 전부인줄 안다고 파이어족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파이어를 부르짖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젊은나이에 너무 빨리 생의 시야를 한쪽으로 좁혀놓는것 같아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과연 그 친구들이 시작부터 파이어족을 외쳤을까요. 돈이 전부인줄 아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한두번쯤 돈이 아닌 것에 인생의 의미를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했다가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인간에 대한 의리, 조직 안에서의 유대감,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점차 나아져가는 성취감, 사회 초년생들이 한번쯤 기대했을 법한 가치들에 기성세대는 어떤 답변을 해주었는지 한번쯤 고민해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