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戀
모란 시장 사거리에 나타난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여자가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어깨까지 닿던 머리카락은 귀와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잘려나가 있었다. 그가 더더욱 '다 틀렸구나'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다. 앙다문 입술, 핏기라곤 없는 낯빛, 그리고 한순간도 그에게 향하지 않는 시선.
작별인사를 위해 마지못해 집을 나왔을 그녀는 '그냥 좋은 동기(同期)로 지내는 것이 좋겠어'라는 말을 겨우 꺼냈을 뿐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중에 읽던 학보를 접어서 겨드랑이에 끼우며 그는 말했다. '얘기를 좀 하자. 왜 헤어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꼼짝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하던 그녀는 '먼저 갈게'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정류소에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그도 그녀의 한마디와 함께 정류소에 남았다. 그리고 보도블록이 쌓여있고 인부들로 분주한 인도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그는, 빨간색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이 흐려져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그는 울었다. 그렇게까지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사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실컷 울었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난 순간 모든 것이 끝나고야 말았다는 절망감이 밀려온 탓이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햇살은 따사롭고, 공기도 맑은 날 오전이었다.
개강을 했고, 그는 휴학을 했다. 이방인이 된 그는 입영 전까지 학교를 기웃거렸다. 혹시라도 그녀가 후회하고 그에게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망념(妄念)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분명했다. 정문 앞 ‘고주망태'라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주점에서 매일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했다.
어느 날 그는 동기들에게 주점 앞 골목에 서 있던 전봇대가 넘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튿날 전봇대는 멀쩡했다. 만취한 그가 전봇대에 부딪혔던 거였다. 그날 이후 일단의 동기들도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동기들 술자리에 끼어있던 어느 날 드디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그녀가 웬일인지 술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다. 그는 그녀를 부축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당부의 말을 했다. '내가 잘할게' 같은 하나마나 한 말을 덧붙이면서.
만취상태에서도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손길과 눈길 모두. '나를 내버려 둬. 너는 나를 만족시킬 수 없어'라는 말로 그녀는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구질구질해질 만큼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입대할 수 있었다.
첫 휴가를 받아 정문 앞 주점 '고주망태'에 갔을 때 간판은 '황소 주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 고주망태는 너무 노골적이기도 하고 근본도 없는 이름이지' 바뀐 간판을 보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우스꽝스럽던 그의 과거도 옛 간판과 함께 사라졌다.
교정 한복판의 인공호수, 일감호(一鑑湖)에는 비둘기와 참새가 날고 있었다. 그리고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는 호주 주변을 나란히 걷고 있는 여러 쌍의 커플들이 보였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개인의 남루함이 이루어 낸 대조를 음미하며 그는 첫 휴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앓던 사랑니를 빼러 갔을 때 치과의사가 말했다. '이는 한번 금이 가면 다시 붙지 않아요. 뼈는 부러져도 다시 붙어서 더 견고해지지만’
그는 치과의사가 펜치로 뽑은 사랑니를 들고 일감호에 갔다. 이를 호수에 던졌다. 그리고 '황소 주점' 간판을 지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표표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정류소 앞 레코드 가게의 턴테이블에서는 안치환의 <소금인형>이 힘겹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