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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Aug 01. 2022

계속 가보겠습니다

임은정 21년 차 검사

임은정이라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검사'에서 외치는 자, 내부고발자, 미운 오리 새끼, 돈키호테, 집중관리 대상 검사, 불가촉천민, 죽비 소리, 예수, 얼치기 운동권 형 검사, 막무가내 검사, 부끄러운 검사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는 책, <계속 가보겠습니다>를 읽었다. 책의 부제는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이다.


일취월장은 못 해도 그날까지 한결같겠노라!

"오늘 오전 1974년 유신헌법 반대 투쟁을 주도한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 연맹(민청학련) 배후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던 박형규 목사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과거사 재심 사건 재판이 있었습니다.(45쪽)" 2012년 9월 6일, 임은정 검사가 검찰 내부망인 이프로스(e-PROS)에 올린 글의 시작 부분이다.


10년 전 이날부터 임은정 검사는 검찰 내부 조직에서 눈엣가시가 된다. 민청학련에 연루된 박형규 목사와 진보당 인사였던 윤길중의 재심에서 피고들에게 백지구형 대신 무죄 구형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들의 관행은 법원의 판단에 맡긴다는 의미로 백지구형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민주인사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것이 분명하지만 선배 검사들의 판단을 뒤집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던 거다.


50여 년 전 사법부의 명백한 과오로 희생된 분들(박형규, 윤길중 등)을 향해 오늘의 검사 임은정은 "어제 당신이 만들려 한 내일이 바로 오늘임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긴다. 그렇지만 같은 오늘을 살고 있는 검찰 수뇌부는 임은정 검사를 고립시키기로 한다. 그녀가 검찰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을 멈출 수 없는 이유

"격동의 2012년, 서울 고검 김 모 부장검사가 다단계 회사 관계자에게서 8억 원 이상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서울 동부지검에서 실무 수습 중이던 초임 전 모 검사가 검사실에서 피의자와 성관계를 했으며, 박 모 검사는 자신이 수사 중인 사건 피의자에게 매형을 변호사로 선임하도록 알선했다.(61쪽)"


검사들의 일탈이나 범행 등의 혐의들이 사실로 파악되도 소용이 없다. 검찰 내부에서는 침묵의 카르텔을 작동시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든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검찰은 완벽하고 고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제재를 받지 않는 현실, 달나라 가는 세상에서 이런 비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이며 퇴행적인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임은정은 "억압적인 조직문화에 눌려 헉헉거리다가 우리 곁을 떠난" 한 초임 검사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


"2003년 5월 2일 밤, 경북의사협회와 합동 회식 자리, A 부장은 술을 많이 마신 저(임은정 검사)를 따로 챙겨 택시를 같이 탔습니다. - 중략 -

(집 앞에서)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컹한 혀에 술이 확 깼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부장님 살펴가십시오'라며 아무 일 없는 척 인사를 하고 돌아서 복도식 아파트를 걸어 관사로 돌아오며, -중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제 등을 확 떠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명을 지르겠다고 위협하고 실랑이 끝에 겨우 내보냈는데도, 되돌아와 초인종을 계속 눌렀습니다. 그 소리가 아직 생생합니다. -중략-

오른손등에 생긴 동전 크기 만한 멍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더군요. 그리고 제 마음의 멍은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141-142쪽)" 

어느 부장검사의 사생활! 142쪽



적격심사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무죄 구형을 강행한 후 도망쳤다가, 12월 31일 월요일 무거운 걸음으로 출근했습니다. 이 모 차장검사실, 최 모 검사장실을 순례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지요. 어찌나 다리가 후들거리던지. 그때 법무부 모 간부가 '저런 미친 X이 있나? 저 X, 검사 적격 심사 몇 년 남았어?'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검사는 임용 후 7년마다 정상적인 직무수행이 가능한지 여부를 가리는 적격심사를 받아 강제로 퇴직당할 수 있습니다.(125쪽)"

검사들이 선임들의 불법 부당한 지시에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 대목이다.


10년의 투쟁 끝에 얻은 권리

검사 게시판에 글쓰기 -> 언론 인터뷰 -> 책 출판

"10년간 검찰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돌아보면, 발이 부르트도록 종종거렸던 저로서는 답답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검사 게시판에서 칼럼으로, 책으로 제 전선을 이렇게나 옮겼고, 징계나 적격심사로 쫓겨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여전히 검찰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184쪽)"


역사에 사는 인간, 임은정

책을 읽다 보면 임은정 검사는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고 오래된 권력집단과 싸워야 하기 때문인지 주도면밀하고 치밀하다. 그러면서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호연지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인문학적 소양 때문인 듯하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일까. 외톨이(조직 내 왕따)가 되면 책을 더 많이 읽을 수도 있고 사색도 더 할 수 있어일까. 폭주하는 업무량 때문에 종종거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때문일까. 그녀의 문장을 읽다 보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기도 하지만, 또 적절한 비유를 읽다 보면 여유마저도 느껴진다. 중국 고사나 시 구절을 인용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녀는 고수(高手)다.


4.3 사건에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제주 북촌 너븐숭이에 세워진 비석을 보며 임은정 검사는 "현기영 작가의 시 <새로운 빛으로 되살아나소서>가 새겨져 있지요.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 영구 불망의 돌을 세운다'는 그 시 구절 앞에 붙박이장처럼 한참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한 맺힌 사연들을 조심스레 꺼내며 비명을 참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거든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주변에 피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 너무도 처연했지요. 4.3의 상징이 왜 동백꽃인지 비로소 알았습니다.(206쪽)"


책을 읽고 나자, 임은정 검사를 계속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임은정 검사 덕분에 검찰 조직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중이다.


임은정 검사는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전 총장, 고 김준엽 선생이 한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자.' 길게 보자면 훗날 역사는 결국 21세기를 살다 간 수많은 검사들 중에서 임은정이라는 단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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