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관계(5화)
호주, You raise me up!
2016년 여름, 여느 해처럼 호주에 가보니 역시 한겨울이었다. 사실 호주에 도착해 처음 겨울을 나는 외국인들은 낮에는 깜빡 속을 수 있다. 해가 좋은 날은 햇살이 따뜻해서 더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지면 기습적인 추위에 당황할 수 있다.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은데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특히, 남호주와, 멜버른이 주도인 빅토리아주가 하루 중 기온차가 심하다. 그래서 호주에는 하루에 4계절이 있다고들 한다.
집 근처에 알디(ALDI) 매장이 새로 오픈했다고 해서 딸아이와 가보기로 했다. 알디는 독일의 알브레히트 형제가 1961년 창업한 생활용품 전문 슈퍼마켓 체인이다. 다른 마켓에는 차를 타고 가야 하지만 이 마켓까지는 걸어갈 수 있다. 집에서 거리가 300여 미터쯤 밖에 안 된다. 개인용 쇼핑카트를 끌고 딸과 걸어갔다. 가면서 이제 3학년 된 딸이 학교에서 새로 배웠다는 노래를 같이 불렀다. 제목은 "유 레이즈 미 업 You raise me up."
"When I'm down and all my soul, so weary
내가 기분이 처지고 영혼이 고통스러울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고난이 닥쳐 억장이 무너질 때, 나는 그대로 머물면서 침묵 속에서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당신이 다가와 내 옆에서 한동안 나와 함께 있어줄 때까지~"
마켓에 가는 동안,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참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성악가라도 된 양 정성스럽게 복식 호흡을 해가며 이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내 노랫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마치 돌림노래처럼. 알고 보니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걷던 우리 부녀 바로 뒤에서 걸어오던 노 부부가 이 노래를 따라서 부르고 있던 거였다. 할아버지는 저음으로 할머니는 고음으로.
우리가 뒤를 돌아보니 "It's beautiful song, isn't it? 아름다운 노래네요. 그렇지요?" 라면서 할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이웃과 아름다운 노래가 주는 소소한 일상을 선물하면서 애들레이드는 나를 맞아주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의 애들레이드 이민생활은 햇수로 5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은 집(유닛)을 구해 월세(정확히 말하자면 주week세)를 내고 2년 살았고, 아내가 비자를 위해 2년 동안 미용실에서 일을 했으며, 경매로 집(하우스)을 구입해 이사했고, 2016년 현재까지도 집 앞뒤뜰 여기저기 수리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 4년 체류할 수 있었던 비자는, 영주비자로 바뀌었고, 취득 후 1년이 지나자 아내와 아이들은 시민권을 신청해 호주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호주에서 살만 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학교와 친구들을 마음에 들어 했고, 아내는 호주에서의 자연친화적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미와 벌과 무당벌레와 지렁이와 각종 새들 역시 모두 우리 가족으로 여겼다.
우리 가족과 비슷한 시기에 애들레이드에 도착했던 다른 가족들의 가장들은 작은 슈퍼나 식당을 오픈했고, 닭고기 포장 공장에 취직하거나 버스 운전기사가 되기도 했으며, 대형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결국에는 조용하고 평온한 애들레이드를 떠나 한국인들이 많은 대도시, 브리즈번이나 시드니로 떠났다. 2012년 처음 도착해 들뜬 마음과 정착에 대한 고민이 교차하며 머릿속에서 난무할 때, 우리도 그들과 모여 공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일시 진공상태가 된 삶의 한 페이지를 공유했더랬다. 내가 한 번씩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한 가족 또 한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거나 바쁜 일상에 쫓겨 그렇게 멀어져 갔다.
호주에 정착해 사는 한국 가족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래도 여성보다는 남성들 삶의 만족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여성들의 일상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돌보고 가사에 전념하면서 할 일이 오히려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이민한 여성들의 삶의 변화는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외국인들과의 친화력도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훨씬 낫다.그러니 여성이 영어와 문화에도 더 빨리 익숙해 진다. 남성들은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데 호주에서는 한국 남성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도 네이티브만큼 할 수 없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업무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지식이 없이 온 경우, 대부분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경로를 거쳐야 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고단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2016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남호주에 사는 한국계 출신 호주인들이 4천 명 정도 된다고 한다. 호주 전체에 살고 있는 한국계가 12만 3천 명쯤 되니까, 교민들 중 약 3퍼센트가 남호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넓디넓은 남호주에서 4천 명은 몇 안 되는 숫자다. 그러다 보니 애들레이드에서는 교회에 가지 않는 한, 한국인 만나기가 쉽지 않다.
호주에서는 모든 일정이 철저하게 가족 위주로 돌아간다. 애들레이드 현지 교회에서 만난 호주 사람들 중에는 아내가 남편 없이 아이들과 사는 모습을 보고 도움을 준 몇 가족이 있다. 그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하고 대화도 나누는 등 도움을 주었다.
내가 호주에 도착하면 아내는 일정을 잡아 매 주말마다 그 가족들을 초대해 보은을 한다. 매년 이런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나도 만족스럽다. 이민을 와서 살면서 현지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곳에 살면서는 수시로 시민권자들의 추천이나 서명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 평소에 친해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막상 도움을 받으려고 친한 척하면 힘들어진다.
한국, 아버지의 어깨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단출하게 여행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표선에 있는 숙소에 자리를 잡고, 렌터카로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성산포에도 가고 중문단지에도 갔다. 잠수정을 타고 바닷속 물고기들도 보고, 재래시장에 가서 오메기 떡도 맛보고, 어머니는 제주도 명물, 갈 옷도 한벌 모자와 세트로 샀다.
저녁에 숙소 근처의 바닷가에 자리한, 허름해 뵈지만 싱싱한 회를 제공하고 있어 지역분 들을 단골로 하고 있다는, 횟집에서 셋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아버지는 "어쩐 일인가? 우리 둘하고만 여행을 다 계획하고?"라고 물으셨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여행 제안은 뜬금없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호주로 떠나고 난 후, 내가 두 분과 대면대면 지내는 것 같아, 모시고 아무 데라도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인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은 궁색하기만 했다. "그냥요."
아버지는 대기업의 회사원으로 계시다가 2천 년이 되기 전, 예순이 안된 나이에 당시 유행하던 명예퇴직을 했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뒤늦게 취직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나보다 먼저 동생 둘이 차례로 결혼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퇴직금은 바닥이 났고, 그나마도 당시 유행하던 IT버블에 하는 묻지 마 주식투자로 모두 잃게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설상가상 은행 빚도 안게 됐던 것이다.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 하시더니 아버지는 영업용 택시기사가 되었다.
10년 정도, 당신은 택시 안에서, 나는 무역회사에서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는 전립선 비대증으로 약을 드셔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굴하지 않고 꾸준한 운동과 음식조절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영업택시의 달인이 되었다.
교통 방송(TBS)에서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교통상황 리포트가 끝나면 서울 각지의 택시 기사님들이 한 마디씩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버지도 방송을 탔다. "나른한 오후지요? 졸지 마시고 ㅇㅇ의 ㅇㅇ프로그램을 들으세요. 저는 택시기사 정ㅇㅇ입니다. 파이팅!!!"
방송에서 익숙한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면서 미소 지었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는 분이었다.
2000여 년 전 유럽을 디자인했다던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어머니는 "당신은 방송에 그깟 한마디가 그렇게 하고 싶습디까? 세상 사람들한테 '나 택시 운전해요'하는 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으셨어요?" 힐난 섞인 질문을 하셨다. 어머니에게는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출퇴근하던 모습의 남편이 지인들에게 보이는 마지막 이미지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난 말이야. 항상 내가 운전하는 택시에 '우리 가족이 타고 있다' 생각하면서 운전을 해요. 택시를 운전하고 있으면 아주 행복해. 이거 아주 멋진 직업이야." 그땐 아버지의 이런 표현이 과장이나 가식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그 말씀들이 돌이켜 보니 어쩌면 당신은 세상의 밝은 면만 보려고 노력하신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태만상의 택시 손님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탔을 터인데 어찌 불편하고 언짢은 일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누구나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조금 손해 보면 그런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말년의 인생을 운영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노신사의 지혜로움도 느껴지지만 한편, 인간사의 비애도 절감하게 된다.
나는 직원이 몇 안되는 작은 무역회사에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동남아와 중동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국의 업체들을 다니며 인터내셔널 비즈니스를 하는 영업맨이 되었다. 세계의 수 많은 업체들로부터 각종 식품 원료를 개발해, 수입하는 일을 맡았다. 분유, 음료, 발효유, 두유, 과즙, 그리고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등 온갖 식품(완제품)에 원료로 투입되는 성분들 중 대부분은 외국에서 수입된다. 내가 근무한 무역회사는, 국내 식품제조사들의 협력업체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수입과 국내 유통이 내가 다닌 무역회사의 주요 업무였다.
소기업의 특성은 사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모든 업무에 투입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사원들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역회사의 특성상 밤새 해외 업체와 실랑이한 내용을 정리해서, 해가 뜬 시간에는 사무실에서 내부 보고를 하고, 다시 국내 거래처들을 만나 영업을 해야 한다는, 즉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었다.
잦은 출장과 격무,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술자리,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계절마다 몸살에 시달렸고, 후드득 코피도 흘렸다. 심지어 머리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탈모반이 여러 개 생기는 원형탈모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10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력으로 빚을 모두 갚을 수 있게 됐고, 나는 그간 맺어온 인맥과 업무 노하우와 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면서 아버지의 택시운전은 끝이 났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처음 결행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원했던, 경제적으로도 효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그림도 그리고 운동도 하시면서 취미생활을 하셨다.
그렇게 각자의 생활을 하면서 내 책임은 이걸로 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만에 빠질 무렵, 나는 부모님께 제주도 여행을 제안한 것이다. 두 분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나 섭섭했던 것들,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을 나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기 보다는, 셋이서 3일 동안 함께 눈빛과 몸짓을 교환하며 소중한 시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행은 분명, 단출한 여행이었지만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3학년 딸아이한테 배웠던 노래, "유 레이즈 미 업"은 이렇게 끝이 난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 you raise me up more than I can be. 당신의 어깨 위에 있을 때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은 나를 만듭니다." 2016년, 나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또 내 딸은 내 어깨 위에서 내면의 힘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