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프라인(4화)
호주, No TV at home? Oh, my god!!!
아내는 미용실을 그만두자마자 두 가지 일에 집중한다. 첫째, 경매로 매입한 하우스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아직 손봐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기본적인 것들 외엔, 일을 하면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집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두번째 일은 아이들 교육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인터넷도 끊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아내의 스마트 폰 하나만 저렴한 통신사에 가입해 사용했다. 필요한 인터넷 업무는 내가 한국에서 처리했다.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하는 일에서부터 세금, 보험, 각종 공과금과 같은 서류 등,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한국에서 원격으로 했다. 호주 특히, 애들레이드는 한국과 시차가 거의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30분(써머타임 땐 1시간 30분)밖에 나지 않는다.
아내가 집에 필요한 건축자재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를 주면 내가 주문하고 교환이나 환불도 했다.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서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영어실력보다는 눈치가 늘면서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또, 호주 사회가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무한친절을 베푸는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아내는 의사소통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 의사소통의 80퍼센트는 눈짓과 발짓(gesture)과 같은 이른바 비언어적(nonvebal) 수단이 차지한다는 말이 맞는다는 학설을 아내는 증명했다.
집에 인터넷이 안되니 아이들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이미 커버린 9학년에 접어든 아들 녀석은 요령껏 공공 도서관에도 가고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장소에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가서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귀찮았던지, 혹은 아빠도 없는 집에서 엄마 혼자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학교 과제에 필요한 것 아니면, 굳이 인터넷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된 둘째는 아예 디지털 기기에 노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접하게 되었다. 몇 달 책을 읽었을 뿐인데 딸은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담당 선생님이 놀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고, 읽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졌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책벌레(book worm)라고 불렀을 정도다. 티브이와 인터넷을 끊었을 뿐인데 아이들의 생활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거실에 티브이를 켜놓고 맥없이 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뭔가 시원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마트에서 구입한 중국 브랜드 하이얼 티브이는 이참에 내다 버렸다.
학교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집 아이들이 티브이나 인터넷이 집에 없다고 하면 학급의 친구들이 놀라곤 했다고 한다. 선생님들이나 다른 학부모들 중엔 '그래서 너희가 책을 많이 읽는구나!'하고 다른 의미로 놀라움을 표시했다고도 한다. 못 해서 없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도 곧 알게 됐다.
한국을 떠나 인터넷도 안되고 티브이도 없는 호주 집에 도착하면 나는 마치 심심유곡의 사찰에 온 듯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분위기에 처음엔 어색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아 디지털 디톡스가 이런 거구나!'
경매로 매입한 집의 수리는 우선 부엌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집 안의 거실과 천정을 고쳤다. 그리고 호주에서는 모든 하우스들이 집 뒤편에 신경을 쓴다. 집 뒤로 데크를 깔고, 지붕을 연장해서 처마를 만든다. 그 공간에서 날씨가 좋을 때는 식사도 하고 지인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도 한다.
아내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하나하나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는 작업은 손수 천천히 해가면서, 공사를 위해 필요한 자재들을 구매해 놓고, 목수나 기술자들을 불러서 일을 시켰다. 처음에는 호주에서 일하는 방식이 쉽지 않아 힘이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적응이 되자, 아내는 공사를 하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했다. 특히 페인트칠은 그녀가 직접 했다. 물론 비용을 넉넉하게 지불하면 호주에서도 기술자들이나 목수들이 A부터 Z까지 알아서 해준다. 전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다.
아내는 틈이 나는 데로 집 앞 뒷마당의 울타리에 꽃과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었다. 매년 집은 조금씩 홈 스위트 홈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 모든 일에 관대하라
"가족은 같이 살아야 가족 아니야?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살아!" 연말 모임에서, 한 친구가 기습적으로 한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에게 이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ㅇㅇ야 이런 가족도 있어."
독일의 요하임 바우어라는 정신과 의사는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마약은 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나약한 일면을 강조한 것이리라. 나는 그 친구에게 상처 입은 만큼, 그전에 어쩌면 내 태도나 행위 또는 말의 어떤 점이 그 친구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자극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친구가 굳이 내 앞에서 그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을 한 달 씩이나 애들레이드에 가서 지내다 오기 때문에 다른 기러기 아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기러기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구성원들이 서로 대화도 별로 없이 대면대면 지내는 가족들보다 오히려 우리 가족이 더욱 밀도 있게 지낼 수 있으니 여느 가족들과 다를 바 없거나 어쩌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위했다.
이것은 오로지 내 생각일뿐이었다. 타인들의 눈에는 '기러기는 그냥 기러기'였다. 실제로 철새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사니까 기러기가 맞다.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 가족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2천2백 년 전 포에니 전쟁의 명장, 한니발의 명언을 떠올린다. "관점을 바꾸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항상 어떤 일을 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때는 절대적으로, 때로는 상대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모험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기러기가 된 이상 퇴근하고 나서 또는 주말에 나는 혼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 혼자 지내다 보면 한없이 외로울 때가 있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을 때도 있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고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때가 되면 한 번씩 오는 감기처럼 그런 감정이 훅 하고 들어올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이나 느낌은 가족이 함께 살아도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오죽하면 류시화는 자신의 시집 제목을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을까. 현명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만족하면서 지혜롭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면 아내와 통화를 한다. 철벽과도 같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아내도 울면서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너무 그립고 보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싶어도 보고 싶지 않아도 그냥 습관처럼 매일 통화를 한다. 퇴근하고 만나 일상을 공유하듯 이야기를 한다. 상황이 안돼서 못 받거나 안 받으면 다음날 하면 된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한동안 냉전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래도 아내는 내 입장을 더욱 안쓰럽게 생각하는 편이다. 확실히 아내는 나보다 아량이 넓다.
회사는 안녕하신가
호주에 가면 만나는 한국분들이 "한 달씩 회사를 비워도 괜찮아요? 사장이 없어도 돌아가나 회사가?" 우려(?)하는 경우가 있다. 호주에 살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한국 분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어넘긴다. 호주 현지인들이나 다른 외국인들로부터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회사는 오너가 없으면서 리스크가 생기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 잘되고 있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후배 동료들이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호주에서 한 달간 머물기로 결정하고 나서 걱정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뒷전으로 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어쩌면 내가 가족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작은 이익에 연연했더라면 회사는 더 작아지고 옹색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옹졸한 사장이 됐을지도 모른다. 일 년에 두어 달은 무조건 호주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맞았다. 모두 다 가지려고 들면 망한다. 인생은 항상 포기와 선택의 갈등 과정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매년 기적과도 같이 회사의 매출은 늘고 이익도 늘어났다. 내가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으니 동료들도 직원들도 회사를 키우는 일에 열의를 갖게 된 것이다. 호주에 한 달씩 나가 있기 시작하면서 나는 회계업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매년 결산을 하고 나서,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발생한 순이익을 나누고 있다. 그냥 나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작은 회사에서 큰 회사로 만들 거라며, 재투자한답시고 임직원들에게 제대로 배당하지 않고 비자금을 쌓아뒀다가 빼돌리는 짓을 하지 않기로 한, 창업 당시의 결심을 더욱 공격적으로 실행했다. 임원들이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이익금을 나누었다가 투자나 비용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다시 걷는다. 투자받는 절차를 밟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호주에 한 달씩 와 있을 수 있는 비결이자 회사가 성장하고 있는 비결이다.
어차피 호주 이민을 계획하다 시작한 사업이다. 요즘 회사에서 내가 집중하는 업무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