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자에게 신이 내린 하우스

2014 from unit to house(3화)

by 정태산이높다하되

호주, Be it ever so humble, there is no place like home!!!

2014년, 아내가 전 해에 이어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시기, 월세를 내며 살고 있던 유닛(unit, 일종의 다세대 주택)을 벗어나고 싶었던 아내는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살던 집의 계약기간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도록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애들래이드라는 도시는, 면적은 서울의 6배나 되지만 인구는 130만도 안 되는 소도시다. 참고로 애들레이드라는 이름이 이 도시에 명명된 것은 1836년인데, 당시 영국의 여왕 Queen Adelaide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애들레이드에 일 년 넘게 지내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의 중심부와 주변지역에 대한 파악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퀸 애들레이드 동상, 애들레이드 타운 홀


당시 살고 있던 유닛의 위치는 에셀스톤(Athelstone)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역(suburb)이었다. suburb는 우리나라의 '구'와 같은 개념이다. 애들레이드 중심부에서 동북 방향으로 10킬로쯤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는 공원과 산이 가까운 지역이었다. 지역 이름에 stone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에셀스톤은 바위 산과 가까운 시의 외곽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애들레이드 시티 중심부에서 가까운 지역이 학군이 좋고 그에 비례해 주택의 가격이 높은 편이다. 그래도 집값은 한국에 비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저렴했다. 보유하고 있던 현금이 부족했던 우리는 호주의 주택 담보 대출 제도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호주에서도 집값의 90퍼센트를 넘어가는 이른바 약탈적 대출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볼 수 없었던 합법적 주택거래 중계인(commissioner 또는 broker)의 설명에 따르면, LTV(담보인정 비율)와 DTI, 즉 주택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의 수입을 고려해 총부채 상환비율, 이렇게 두 요소를 적절히 반영한 주택담보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집값의 60퍼센트 정도가 대출의 최대 가능 비율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2014년 당시에는 한국에서 받는 근로소득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를 발급받아 번역해 공증을 한뒤에 제출하면 호주 은행에서 대출심사를 해준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 제도 -한국의 근로소득 증빙으로 호주에서 대출을 받는- 는 부작용이 많았는지 몇 년 뒤에 폐지된다.


나는 한국에서 마련할 수 있는 자금과 근로소득원천징수 영수증과 같은 서류를 준비했다. 아내는 호주에서 주말마다 시간 나는 데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좋은 지역의 오래되고 낡은,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집들이 공략 대상이었다. 노년 인구가 많은 호주에는 노인들이 혼자 지내다가 돌아가시게 되면 그 자녀들이나 상속자들이 남은 집을 경매로 내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내는 그런 집들을 물색했다.



연초 아내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우리 형편에 맞는 경매물건이 자신의 레이다망에 포착됐으니 경매 날짜에 맞춰 오라는 거였다. 서류를 챙겨 부랴부랴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켄싱턴 파크(Kensington Park)라는, 시티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집이었는데, 그 부지는 약 300평이나 됐다. 아내는 집이야 수리하면 되고 넓은 뒷마당을 잘 가꾸면 이 집이 오래오래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좋은 지역에 합리적 가격, 아내는 자신이 원하던 집을 발견한 것이다. 최초 경매 호가는 50만 불 초반이었다. 한화 4억 원 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매 날짜에 우리는 제일 먼저 가서 등록을 하고 번호표를 받았다. 경매번호가 1번이었다. 경매에 임한 사람들의 숫자는 16번까지 있었다. 경쟁자들은 다양했다. 호주인, 호주의 건축업자, 중국인, 인도인 등이 각각 몇 명씩, 그리고 한국인은 우리 부부뿐이었다. 경매가 시작되자 만불, 오천 불 씩 호가는 올라갔다. 호가가 60만 불에 육박하면서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떨어져 나갔고, 60만 불이 넘어서자 우리의 경쟁자는 호주 건축업자만 남았다. 아내는 나를 계속 부추겼다. "이 집은 저평가된 것이 맞으니까 웬만큼 더 줘도 괜찮을 것 같아요. 더 불러요."

2014년 봄 경매로 구입한 하우스의 2021년 모습

결국, 65만 불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66만 4천 불을 불렀다. 순식간에 1만 4천 불을 올려 부른 것이다. 그 액수가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최대치였다. 건축업자는 포기했고, 집은 우리에게 낙찰됐다.


한국, 대한민국 호의 궤도 이탈

그런데 그즈음 한국으로부터 비보를 들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날의 전과 후로 확실하게 양분된다. 그 해엔 어떤 일이 있어도 즐거울 수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한 해가 되었다. 어이없는 참사는 대한민국의 표정을 어둡게 했고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겼다. 국가 자체가 전복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꽃다운 나이의 어린 학생들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어쩔 수 없이 일상은 계속됐지만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은 모두 흑빛으로 남았다. 연일 보도된 비보에 모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호주 방송에서도 보도를 했기 때문에 호주 사람들 또한 너무 가슴 아파했다.


당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던 학생들의 또래들이 지금 2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이 시기 내가 읽은 책은, 데이비드 월시라는 미국의 교육심리학 박사가 쓴 <10대들의 사생활>, 밀란 쿤데라의 <농담>, 조반니 파니니가 지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 이야기>, 곽노현의 <징검다리 교육감>, 빈센트 스테니 포드의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들>, 카뮈의 <이방인>, 오구마 에이지의 <사회를 바꾸려면> 등과 같은 교육이나 격변기 정치체제, 그리고 울고 있는 자들과 함께 울어준 실제 예수의 모습과 같은,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담긴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참사로 깊은 상흔에 신음하던 한국 사회에 던져진 의문은 나를 기성세대로서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한 것 같다.


당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던 학생들의 또래들이 지금 2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그들은 직장을 다닐 수도 있고, 군대를 다녀오거나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졸업을 했을 수도 있는 나이다. 이들에게 깊게 뿌리 박힌, 국가와 공권력, 그리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반영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세대들이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이 흐르는 것 같지만 수면아래에서 들끓는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든 결국, 바깥으로 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도 변화를 맞이했다. 서울 송파구에 있던 사무실의 임대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건물주는 임대료를 대폭 인상했다. 사무실을 옮기기로 했다. 물론, 홧김에 내린 결정은 아니다. 굳이 서울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송파에서 멀지 않은 성남시로 이사했다.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한 미분양된 아파트 형 공장을 저렴하게 매입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2의 도약을 위해 강남 3구에서 성남의 테크노밸리 단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거품을 빼고 실리를 챙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비용은 대폭 줄고 공간과 시간의 여유는 늘었다. 거점을 외곽으로 옮겼지만 찾아올 사람은 다 찾아왔다. 해외업무는 당연히 서울이든 지방이든 관계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국내 거래처와의 소통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삶을 추구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이 발생했다.


사무실이 이사하면서 내부 공간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우리 조직원들만의 공간이 좀 더 여유롭게 생겼고, 나만의 공간도 만들어졌다. 이 시기 나는 쉬는 날에도 사무실에 출근했다. 직원들이 없는 사무실에서 책 읽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휴일 황량하리만큼 텅 빈 단지에서 혼자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묘했다. 호불호를 딱 잘라서 표현하기 힘든 양가적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자유를 만끽하다가도,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도 했고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도 했다.

당시 우연히 본 영화가 생각난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나는 전설이다>다. 하필이면 우리 가족이 호주로 떠나게 된 해인 2012년, 인류가 멸망해 뉴욕의 유일한 생존자, 장교 출신 인물인, 로버트 네빌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내 처지를 생각하며 주말의 황량한 산업단지에 홀로 서있노라면 감정이입이 저절로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의 영화였다.




아내의 말처럼 시간은 여지없이 흘렀고,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외부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사업을 함께 하는 직원들의 삶도, 이민한 내 가족의 삶도 모두 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외롭기도 했고 어린 딸이 눈에 밟히는 순간이면 눈물짓는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날마다 자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편을 선택했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가면서 점점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뉴욕에서 혼자 생존하고 있던 주인공, 네빌이 자신을 찾아낸 생존자, 젊은 여성과 어린아이를 만나 또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 떠나면서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희망과 절망이 한 해에 공존하던 2014년 10월에 우리 가족은 연초에 낙찰받은 새집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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