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드에서 시작된 전쟁

2013 임무&도리(2화)

by 정태산이높다하되

한국,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다

대학원 시절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영화배우 한석규의 열혈 팬이었던 한 여학생이 그가 주연한 영화, <은행나무침대> 개봉일자가 다가오는데 고향에 급히 내려가야 할 일이 생겼다며 난감해했다. 자신의 고향은 시골이라 영화를 볼 수 없게 됐다며 울상이 된 그녀는 내게 제안했다. 영화가 개봉하면 내가 가서 보고 오라는 거였다. 그리고 기념으로 영화표를 자신에게 가져다주고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녀의 문화소비 방식을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러마고 그녀가 주는 영화비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 챙겼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포함한 일상의 잡일로 바빴던 나는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영화 상영이 끝나도록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다.

강제규 감독, 한석규 주연의 영화, <은행나무 침대> 포스터


새 학기가 시작됐고 그 여학생이 나를 찾았다. 다짜고짜 영화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대하고 나서야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기억해 냈다.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나의 무성의함을 파악하고 난 후 그녀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구나!' 나는 천하에 몹쓸 놈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김현철의 CD를 정성스레 사모으고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영화를 꼼꼼히 관람하며, 관심 있는 분야의 이슈를 다룬 책들을 사서 읽던 그녀의 고상한 취미에 나는 재를 뿌리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핑계 삼아한 말은 "혼자서 무슨 재미로 영화관을 가냐?"였다. 대답 대신 그녀의 새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너는 혼자 못 놀지? 너 같은 인간이 대표적인 타인 의존형 인간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 큰걸."


이 말은 해머가 되어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혼자 지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질문은 신선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녀는 내가 돌려준 영화비를 받아 표표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혼자 노는 것도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러기가 된 나는 당연히 그녀의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을 떠올리기 전까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친구들에게 연락해 골프를 치자고 했고, 술을 한잔 하자고 했으며, 등산을 함께 하자고도 했다. 그렇지만 믿었던 지인들의 잦은 거절은 나의 마음에 깊고도 진한 상처를 남겼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바쁜 직원들을 괴롭힐 수도 없는 노릇, 한 달에 한번 하는 사내 회식이 나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그 시기 오래전 그녀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너 혼자서는 못 놀지?"


쉬는 날마다 잠실의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과 <개미>를 읽었다. 상상력 사전은 천 페이지가 넘는 지식 백과사전 개념의 책이고, 개미는 4권짜리 장편소설이다. 읽는데 두어 달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유행하던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여행의 기술>, <불안>을 읽었다. 이쯤 되니 혼자 있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시간은 없었으니까. 2013년은 두 프랑스 작가들의 지적 유희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면 여름과 겨울이 됐고, 나는 호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서 애들레이드까지는 직항이 없다.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 홍콩, 또는 광저우 같은 도시를 경유해야 남호주의 주도 애들레이드에 갈 수 있다. 1박 2일 코스로 가야 하는 긴 여정은 나의 백팩에 서너 권의 책을 준비하게 했다.



호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호주와 한국은 시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실시간 통화가 가능하다. 거의 매일 화상통화를 하게 되니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물리적으로 노력하면 가능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호주에 도착해 보면 통화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서적 심리적 교감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일일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세한 일상은 오감으로 느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은 화상통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모니터 화면 속 아빠는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호주와 한국은 경도가 비슷한 위치에 있어 시차가 거의 없지만 위도는 적도 기준, 아래 위로 뚝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계절이 반대다. 러닝셔츠만 입은 아빠와 두터운 털 잠옷을 입은 아이들 간, 지구 반대편에서 마주 앉아하는 대화에 감흥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 가족이 호주 이민성으로부터 받은 거주비자는 4년 동안 남호주에 거주할 수 있는, 지역과 시기가 제한된 남호주 정부 후원(sponsored by South Australia government) 비자였다. 그리고 4년 중 1년은 주정부의 국세청에 세금을 내는 직업을 가져야만 영주비자를 취득할 수 있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동네 미장원에서 보조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호주 이민을 준비하면서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애들레이드에서 미용실을 경영하는 한국인 원장을 알게 되었고, 그 미용실에 가서 청소와 허드렛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원장은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 준비, 예약 전화와 같은 보조업무를 담당할 사람을 고용해야 했지만 비싼 인건비와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에 고용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서너 달 동안 성실과 친절로 무장된 아내의 업무 태도를 인정하게 된 원장은, 아내에게 합리적 임금과 영주 거주비자를 취득하고 나서도 1년 더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게 된다. 영주권과 인건비를 서로에게 내 건 합리적 협상은 그렇게 계약으로 이어졌다. 영주권을 취득하고도 1년 더 근무해하는 조건은 어린 딸이 있었던 우리 가족에게 가혹했지만 아내는 받아들였다. 우리 가족의 타향살이 고난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아들은 학교에 다녀오는 3시부터 엄마가 퇴근하는 5시 반까지 두 시간 남짓 방치됐고, 어린 딸은 일찌감치 끝나는 유치원에서 엄마가 데리러 오는 시간까지 남아서 보육교사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인건비가 값비싼 호주에서는 고액의 추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더욱 힘겨웠던 것은, 호주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는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환절기마다 풍토병처럼 감기를 달고 살게 되는데, 셋은 죽으나 사나 직장과 학교와 유치원에 무조건 가야 했다. 아직 코흘리개였던 둘째는 열이 펄펄 나도 엄마의 퇴근시간까지 유치원에서 대기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방학에는 한 달씩 내가 가 있었으니 아이들을 챙길 수 있었다. 애들레이드 공항에 새벽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은 자고 있고, 아내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싱크대엔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있었다. 쌓인 설거지의 높이는 아내가 맞이한 고난의 심각성으로 보였다.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들이 등교, 등원할 때는 더 심했겠지' 생각 하면서 영화의 장면처럼 아내가 여러 일들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설거지 타임! 그리고 나서야 나는 아이들과 학교나 공원의 들판에 나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도착한 첫날의 일과였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면 우리 세 식구는 엄마가 근무하는 미용실에 가서 퇴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4주는 쏜살처럼 흘렀고, 출퇴근으로 녹초가 된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번 어느 중년의 사내와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가 아들래이드 공항에 울려 퍼졌다.

다섯 살, 딸의 모습


다 가질 수는 없다. 재물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게 되니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고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긴 하지만, 참 얄궂은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불평을 입밖에 내는 날이면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집사이기도 한 아내는 성경책을 읽다가 -늘 아내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한두 시간씩 성경책을 읽는다- 차분하게 말했다. "이 또한 다 지나가지요. 노력 없이 얻은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가 있겠어요? 일이 년 지나고 나면 웃으면서 얘기할 날이 올 거예요."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아내는, 미대를 졸업하고 청주에서 자그마한 미술학원을 개원해 운영하고 있었다. 혼기가 꽉 찬 나를 결혼을 전제로 다시 만난 것은 그녀의 학원이 막 자리를 잡을 무렵이었다. 연애를 1년 했고, 결혼과 동시에 첫애가 생겨서 결혼한 해에 출산도 했다. 학원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남에게 헐값에 넘겨야 했고, 신혼의 단꿈도 사라졌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동생을 데리고 자취를 했던 아내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닥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선택을 하고 나면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었다.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은 치열하고도 정교했다.


2년 동안 결근은커녕, 지각이나 조퇴도 한 번 없이 미용실에서 근무했다. 뿐만 아니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실력으로 전화로 들어오는 예약을 모두 처리해 고객을 위한 서비스 시간표를 짜는 경지에 이르렀고, 몇 개월이 흐르자 초보 미용사에게 그 어렵다는 이른바 가위질(커트)도 할 수 있게 됐다.


원장은 그야말로 가위손이었다. 커트는 무조건 5분 내로 깔끔하게 끝내버린다.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내공으로 무장된 원장의 보조로서 아내는 원장이 다음 손님을 지체 없이 상대할 수 있도록 미리 손님을 착석시키고 목에 가운을 두른 다음, 머리카락에 수분이 스며들도록 적당량의 물까지 분무하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원장이 가위를 들고 손님에 접근만 하면 되도록 완벽하게 세팅해놓는 것이 아내가 생각한 자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원장이 기대한 그 이상을 생각했다고 한다. 전화응대부터 청소, 식사 준비와 계산까지 손님이 들어와서 나가기까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 빼고는 모든 일을 제대로 소화해 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보조가 부지런하고 싹싹하니 원장이 만족한 것은 물론, 아내를 찾는 현지 단골손님이 생길 정도로 아내는 미용실 적응에 성공했다.



2014년이 되면서 계약기간이 끝나게 되자 원장은 아내에게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함께 미장원을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아내는 원장의 강력한 러브콜에도 꿈쩍하지 않고 사표를 냈다. 아내와 아이들은 호주 현지의 생활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현지인들과 교류도 하고 호주의 문화도 공부하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둘째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됐기 때문에 아이들의 엄마는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영주비자도 받았고 원장과의 약속도 지켰으니 아내는 임무도 도리도 다 하게 된 것이다. 한겨울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신음하게 되는 몸살에 걸려, 밭은 기침을 해가면서도 어떻게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서 출근을 강행하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나는 호주에 가면 그 미용실 원장에게 나의 머리카락을 맡긴다. 그녀는 여전히 우리의 든든한 이웃이다. 원장은 가위하나로 자녀 셋을 모두 대학에 보냈고 멋진 하우스도 장만했으며, 지역의 유지가 되었다. 겪어보니 그분은 아내의 멘토로서 자격이 충분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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