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을 결정했는데 갑자기 사업을?

2012 기러기&사업(1화)

by 정태산이높다하되

몸이 크고 몸빛은 암갈색을 띠며 부리 밑 부분은 노란색, 목은 길고 다리는 짧으며, 몸무게는 1.5~4킬로그램쯤 된다. 곡물의 종자를 먹이로 하는 새, 위키백과에 소개된 기러기에 관한 내용이다. 전 세계에 14종이 서식하고 있다는 기러기, 나는 2012년 어느 날 기러기 15번째 종이 되었다.


2012년 8월 7일 오전

나와 아내, 그리고 6학년 짜리 아들과 만 네 살이 된 딸은 남호주의 주도, 애들레이드의 공항 대합실에 네 덩어리의 짐꾸러미와 함께 부려졌다. 인천 공항에서 애들레이드 공항까지는 직항이 없는 탓에 우리는 싱가포르에 들러, 밤 12시가 다 된 시각까지 대합실에서 기다렸다가 애들레이드행 비행기에 실려 새벽녘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애들레이드 공항 전경, 오른편 건물은 주차장, 왼편 건물은 대합실.

마중을 나오기로 약속한, 애들레이드에 거주하는 목회자분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은 목회활동을 하면서 부업으로 한국에서 이민을 오는 사람들이나 유학 또는 워킹홀리데이로 입국하는 젊은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일정기간 숙식을 제공한다고 했다. 소정의 비용을 내면 우리가 호주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고 액수와 일정까지 공유한 상황이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번호 주인은 묵묵부답,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는 공항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마지못해 전화를 받은 듯, 그분은 다른 일이 있어 나오지 못했다며 "우리가 정확히 만날 약속을 했던가요?"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입으로 내뱉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아무렇게나 성의 없는 대꾸를 하고 있었다. 다른 급한 일이 있어 못 나왔다고 핑계를 대면서 자신과 확실히 만날 약속을 한 것이 맞느냐는, 모순되는 변명과 질문이 나를 아연케 했다. 이메일과 통화로 수차례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비행 편을 확인했건만 야속하게도 그는 편안한 일상의 언어로, 가족을 이끌고 생면부지의 땅에 도착한 한 집안의 가장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화를 낼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이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인연을 맺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순간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이미 십 년이 넘는 해외 출장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무역 전문가였다. 낯선 곳에서의 생존, 두렵지 않았다. 다만 현지에 계신 분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던 계획을 급변경해야 하는 일이 내 마음을 조급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 전 어느 날

호주 이민성으로부터 서울 송파에 위치한 나의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배달된 이메일의 제목은, 호주 입국을 승인하는 서류(Grant Letter)였다. 웰컴 투 오스트레일리아로 시작하는 편지는 호주 거주 비자가 승인되었으니 1년 내 입국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주비자를 신청한 사실조차 흐릿한 기억으로 남았을 무렵, 그러니까 비자를 신청한 지 3년쯤 경과한 후 날아든, 특히 나에게는 반갑지만은 않은 편지였다.




3년 전 그러니까 2009년

비자를 신청할 당시 아내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당신 수입 가지고는 우리나라에서 두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기 어렵다. 더군다나, 우린 집도 없이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고 있지 않은가. 떠나자. 다행히 당신은 영어가 되지 않느냐?"


아내에게 설득당한 나는 서류를 준비하고 영어시험(IELT)을 보게 된다. 호주 이민성에서 목록화해 둔 부족 직업군에는 무역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이민 자격이 주어진 나는, 경력증명서와 여러 증빙 서류와 함께 시험성적을 제출해 놓고 입국허가 비자를 기다렸다. 가족관계 증명서, 아이들 백신 맞은 이력, 학교 재학증명서, 심지어 우리 부부는 범죄 전과가 없다는 증빙 서류까지 경찰서에 가서 떼야했다. 모든 신청 절차가 끝나자, 이민을 코디네이트 해주고 있던 업체의 담당자는 내게 수 주일 내 비자가 발급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해주었다.

그러나 비자는 나와야 나오는 것이었다. 호주의 이민 정책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비자 발행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니 기다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경악할 내용으로 말이다.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사표까지 제출한 상황, 나는 난감했다.



호사다마

동종업계에 종사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기간 밤낮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무역일이라는 것은 외국과의 시차가 있어서 수시로 야근과 밤샘 작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춘을 바쳤지만 중소기업의 급여는 한계가 있었다. 오르는 집값과 물가를 따라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입사 당시보다 회사는 수십 배 성장했지만 나의 연봉은 두배쯤 올랐을까. 사장은 미래를 위한 약속의 약속을 거듭하며 나에게 희망을 안겼지만 나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그것이 희망고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나름 구축한 것들을 포기하고 호주로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이민추진에 급제동이 걸렸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결심을 아는 업계의 지인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사업을 시작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내가 사업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이슈였다. 사장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상황,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믿을 만한 동료에게 동참을 제안했다.


몇 달간 준비했다. 대출을 받고, 사업자 등록도 하고 거래처에 영업도 했다. 기적과도 같이 아이템 몇 개를 수주할 수 있었다. 살얼음판 같이 조심스럽던 사업 초기, 행운의 여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세 명의 급여와 경비를 감당할 만큼 매출이 발생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집과 차를 사고 둘째는 영어유치원에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우리 삶이 윤택해질 무렵, 내 메일함에 까맣게 잊고 있던 예의 그랜트 레터가 날아든 것이다.


아내는 내가 호주로부터 온 서류를 보여준 그 순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빠, 내가 애들하고 가서 잘 살아볼게. 오빠는 왔다 갔다 하면 되잖아요." 나는 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민성에서 날아들 그랜트 레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동상이몽이란 사자성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임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대출을 끼고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집을 팔아 경비를 마련하고, 나는 여름과 겨울, 각각 한 달씩을 호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치 옆동네로 이사하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민이었다.




다시 2012년 8월

마중 나오기로 한 분과 불편한 통화를 끝낸 나는, 일단 공항에 입주해 있는 렌터카업체의 프런트로 가서 차를 빌리기로 했다. 네 가족이 탈 수 있고 짐도 편하게 실을 수 있는 승합차와 내비게이션을 빌렸다. 그리고 시내에서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집을 구할 때까지 머무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애들레이드에서는 백팩(bag pack)이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 게스트하우스였다.


우리 가족이 이틀 머물렀던 백팩으로 불리는 게스트하우스

그런데, 공항을 떠나기 위해 운전석에 앉은 나는 당황했다. 운전석이 우리나라 차의 조수석이었던 것이다. 일본이나 영국 출장 중에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본 적은 있지만, 반대쪽 차선 운전은 처음이었다. 가족과 짐을 차에 싣고 달리는 내내 등에 진땀이 흘렀다. 특히, 차선이 없는 이면도로를 달릴 때는 마치 호주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내 삶처럼 오른쪽과 왼쪽이 뒤죽박죽 되어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는 듯했다.


우선 집을 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은행계좌가 있어야 했는데, 계좌 개설을 위해서는 휴대전화가 있어야 했다. 휴대폰 가게에 들러 전화기 하나를 급하게 개통했다. 그리고 시내의 한 은행으로 갔다. 은행의 이름은 Commonwealth Bank였다. 계좌가 개통되고 직불카드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주일, 일단 계좌번호와 입금된 돈의 액수가 적혀있는 서류를 들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랴부랴 부동산에 전화해서 직원에게 학교와 교회와 마트가 트라이앵글 형태로 포진한 지역에 렌트가 가능하면서도 저렴한 집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은 운전면허증, 호주에서 여권 외 본인을 증명할 ID는 운전면허증이었다. 다행히도 남호주에서는 한국의 운전면허증과 함께 신청서를 작성해 별도의 비용을 제시하면 시험 없이 호주 운전면허증을 내주었다. 이 나라에는 합법적 급행비가 있었다. 70 호주달러 정도를 내면 2주가 걸린다던 면허증 발급이 단 3일 만에 된다고 했다. 우리 돈 6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 지불했다.


아주 기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데 이틀이 소요됐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유닛(unit)이라고 불리는 월셋집에 입주를 할 수가 있었다. 번갯불에 콩을 볶았다. 호주에서 유닛은 하나의 건물에 여러 가구가 입주해 있는, 우리나라의 다세대 주택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하우스가 의미하는 것이 흔히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외국의 집으로 봐왔던 앞 뒷마당이 있고 울타리나 화단이 둘러져 있는 독채 건물이다.


집앞 쇼핑몰, 뉴튼 빌리지

낯선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불안했다. 우선 최소의 비용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의 뇌를 지배했다. 한쪽으로 쏠린 생각은 좀처럼 여유롭고 유연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나중에 배에 실린 이삿짐이 도착하고 보니 그 집은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호주에서는 집을 렌트할 때 호주 시민권자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 집은 그 추천서조차도 필요가 없을 만큼 남루한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아내와 두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 집으로 입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애초에 부동산 직원에게 요구한 대로 집의 우측으로는 2백 미터 안쪽에 초등학교가, 좌측으로는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으며 2차선 찻 길을 건너면 되는 맞은편에는 쇼핑센터 -이름이 뉴튼 빌리지였다. 애들레이드에는 자발적으로 이주해 온 영국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그들을 위해서 쇼핑몰에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이름을 붙인 듯하다- 가 있었던 것이다. 삼각편대로 위치한 편의시설을 갖춘 집의 위치가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집으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커다란 공원도 있었다.

아이들의 첫 학교, 쏜돈 초등학교


집 근처 초등학교(Thorndon Primary)의 교장선생님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6학년 아들은 호주에 입국한 이튿날부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둘째는 집 뒤편의 공립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등교(원)시키고 아내와 나는 은행으로 교통행정과로 마트로 돌아다니며 일을 볼 수 있었다.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후엔 렌터카를 반납하고 차를 구입했다. 혹시 몰라 튼튼한 미국산 중고 지프로 결정했다. 자동차 보험까지 가입을 하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어느덧 나의 귀국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 이별

큰 아이와 아내는 새로운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는 일에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어린 딸도 유치원에 금방 적응했다. 일요일에 현지 교회에 가면 호주인들이 친절하게 맞아주었고 몇 명의 한국인도 사귈 수 있었다. 낯선 곳이긴 해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예의를 갖추기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집 근처 공원(Thordon Park)에는 고기를 준비해 돗자리를 챙겨가면 공용 화덕에 얹힌 그릴이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고기를 구워 먹고 잘 치우기만 하면 됐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잘 지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자 안심할 수 있었다.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찾은 한산한 애들레이드 공항 대합실은 그새 익숙한 곳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간 사이 아내는 나를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가 없는 것을 알고 실망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둘째는 아직 5살밖에 안됐으니 영문도 모른 채 아빠와 떨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927B85AE-808C-4741-BED4-3A4925CAD706.heic 호주에서의 첫집, 유닛(unit)의 전형적인 모습, 한 동에 네 가구가 살았다.

딸의 이름은 바니다. 2008년 생이다. 아내와 상의 끝에 내 나이 마흔에 낳은 늦둥이다. 당시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해 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던, 존 그레이라는 미국의 심리치료사가 지은 책, <Men are from Mars, Women are from Venus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사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가 두 줄이 그어진 임신 진단 키트를 내미는 것이었다. 존 그레이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을 집필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했는데, 그녀 이름이 바니(Bonnie) 그레이였다. 당시 아내와 나는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태명을 바니로 정했다. 아내는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고, 마침 딸이 태어나자 호적에 올릴 정식 한글 이름도 바니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민을 실행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10년 이상 세계 각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업무를 보면서 나는 모험가적인 성향이 있다고 믿었지만, 나는, 프론티어도 탐험가도 모험가도 아니었다. 다 던지고 떠날 만큼 호연지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바다 건너(overseas)라고는 제주도하고 신혼여행 때 가본 사이판이 전부였던 아내는 용감했다. 애들레이드에서 내 눈에는 아내가 한 명의 탐험가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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