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아버지(9화)
아버지의 소천
2020년 3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2018년 3월, 기침이 멎지 않고 오한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아버지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와 함께 분당의 차병원을 찾았다. 약 2주쯤 뒤에 두 분을 앞에 놓고 의사는 폐암 말기 판정을 선언했다. 오진이어야 했다. 나는 부랴부랴 아버지를 모시고 3차 진료기관인 아산병원을 찾았고 아버지는 입원해 며칠 동안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알아낸 사실이라고는 폐암인데 육종성이어서 장기와 뼈에까지 빠르게 전이가 됐다는 극단적 정보뿐이었다.
3개월 이내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의사는 또박또박 엄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진행할지 여부는 본인과 보호자가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일말의 희망도 사라진 시점에 아버지는 무너졌고, 식음을 전폐했다. 종양의 기습적인 공격에 생명이 약탈당하기 직전의 상황,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절망이나 슬픔 이전에 당황, 혼돈의 표정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생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절감해야 했던 것일까.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4~5킬로그램 빠진다.
가족회의를 했다. 3개월 남은 상황에서 항암치료는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편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양평의 요양원에 가서 당분간 지내보기로 했다. 그러나 요양원에 간지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산속 요양원이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양원이 생각보다 쾌적하지 않았다. 미세먼지에서도 자유롭지 않았고, 편의시설도 편리하지 않았다.
나무숲을 거닐면서 피톤치드를 쐬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요양원을 찾는 이유였다. 말기암 환자에게 숲 치료가 효과는 있겠지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에게는 역부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거동이 자유로운 때 뭔가 정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집에서 지내가다 떠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절망이라는 날카로운 창에 찔려 고통에 신음하던 우리 가족에게, 드라마틱하게도 예비된 반전이 펼쳐진다. 병원에서 낭보가 날아든 것이다.
병원에서 암 검사를 할 때 혹시나 표적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유전자 검사를 해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독일에서 개발된 신약의 임상대상자로 선택되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3개월도 힘들 것 같다던 아버지는 알약을 하루 2회 복용하면서 정상인의 삶을 되찾는다. 보너스로 얻은 2년의 삶 동안, 아버지는 집에만 있지 않았다. 손수 운전하면서 어머니와 방방곡곡을 다니며 추억을 만들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호주 애들레이드 집에도 다녀가실 수 있었다.
독일의 신약(항암제)은 두 알씩 하루 두 번 시간을 지켜서 섭취하면 됐다. 처방은 간단했고, 복용은 편리했다. 오래오래 괜찮을 줄 알았다. 적어도 5년쯤은.
2020년 1월 약의 반복 복용에 의한 내성으로 신약의 약효가 더 이상 듣지 않게 된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달포만인 2020년 3월 초, 소천하셨다. 향년 77세. 적지 않은 나이지만 백세건강을 외치는 시대를 감안하면 젊은 나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직 함께 할 것이 많이 남았다는 안타까움, 무엇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억지가, 나를 칠흑같이 어두운 심연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했다. 나는 내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애들레이드에서 온 가족
아버지가 임종을 앞둔 시점은, 코로나19가 전염병 경보 중 6단계에 해당되는 팬데믹으로 전환된 시점이었다. 극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이 호주에서 출발해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3월 초는 호주나 한국이 아직 격리 제도가 정착되기 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독일 신약의 최초 임상대상자였던 아버지를, 의사들은 계속 예의 주시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팬데믹 상황에서도 그들은 입원실 옆 응급처치실을 며칠 동안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간헐적으로 정신이 드는 아버지 옆에서 밤새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울고 웃고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악도 들으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어머니
2년 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던 날은, 어머니의 칠순을 기념하기 위해 저녁식사가 예약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불판에 얹힌 고기는 타도록 손대는 이가 없었고, 손녀들이 안기는 꽃과 선물, 편지는 펼쳐지기는 했는데 내용물은 무엇이었는지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 마땅히 주인공이어야 했던 어머니는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표적치료를 받게 됐는데도 안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진다며 걱정했고, 엄연히 환자인데 일상생활을 정상인과도 같이 해내는 아버지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정기검진과 새 약을 배급받기 위해 두 분을 모시고 매달 병원에 가는 날에는 이런 생활이 얼마나 더 이어질 수 있을지 어머니는 불안해했다. 일심동체 중 반쪽의 생각은 자녀들과는 다른 지점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혼자가 된 어머니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어머니가 혼자서 견뎌야 하는 절대 시간 동안은 자식들도 함께 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당신의 동반자와 함께 한 세월을 반추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매달 절에 다니던 어머니는 집에서 불교방송을 들으면서 마음을 달랬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업무가 끝나면 아버지가 좋아하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반복해 들으며 끊임없이 걸었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다. 2700여 년 전 로마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137억 년 전 빅뱅부터 시작되는 우주와 지구, 사피엔스의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서 인간사가 얼마나 하찮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 묘미가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내용이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의 투병기간 동안 아무도 묻지 않았던 어머니의 안부를 챙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계절이 바뀌고, 슬픔이 공허와 체념으로 바뀌고, 조금씩 마음속 그 빈 공간을 서로의 온기로 채우게 되던 즈음, 어머니는 그제야 '산사람은 살아야지'하는 것이었다.
삼우제를 지내고 호주로 돌아간 가족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중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로 지내고 있었다. 2020년은 내게 이민 후 처음으로 호주 집에 가보지 못한 해가 되었다. 인생은 우연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우연이 언제 어떻게 내게 다가올지 모르니 그저 평소의 내 삶을 꾸준히 가꿀 일이다.
모든 일에는 운이 따른다. 행운과 불운은 겹쳐서 오기도 하고 차례대로 오기도 하고 둘 중 하나만 자꾸 오기도 한다. 과거 이민을 준비할 당시, 이민성에서 우리 가족을 위한 비자를 무기한 연장했을 때는 불운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일은 뜻하지 않게 내가 독립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행운이 함께 하자 사업은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3년 만에 느닷없이 호주 이민성에서 비자를 발급해 준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족과 떨어지게 됐다. 내게는 호사다마의 시절이었다. 이 일은 불운인지 행운인지 아직도 평가하기 힘들다.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된 일도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드린 것은 행운이다. 십여 년 기간 동안 아버지가 어머니와 행복하게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다.
내가 일 년에 한 달씩 애들레이드에 가서 가족과 보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던 때가 그리운 시절이 됐다. 2020년은,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 주었다는 문구,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모두가 되뇌는 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