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예종, 성종)
수양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때려죽인 후 단종을 내쫓은 다음, 왕이 되었다. 세조다. 그는 정통성의 부재, 그리고 국가의 미래 비전 부재로 얼룩진 민망한 왕이었다. 신숙주와 한명회, 권람과 같은 노회하면서 잔인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올려놓고 그들과 친구처럼 지냈다.
새로운 공신으로 구공신을 견제하려고 했을 정도였으니 폭발적으로 늘어난 공신들의 전횡으로 고통받는 대상은 역시 백성이었다.
피의 학살극을 벌인 후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왕이 된 그는 대낮부터 공신들과 술타령 하는 날이 많았다. 의리를 들먹이며 사나이들의 우정을 얘기했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근현대사에도 쉽게 여러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다.
세조의 대표적 공신 신숙주의 추태를 보자. 이 인간은 폐위된 단종의 왕비였던 송씨를 자신의 종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공신들 대부분의 행태는 이렇듯 비윤리적이고 패륜적이었다.
무리하게 권력을 잡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수양의 조부, 태종은 달랐다. 공신과 외척들의 발호를 극도로 제한했고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은 가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응징했다.
왕권이 강하다는 것은 신하들의 권력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하들의 권력이 약하다는 것은 백성들이 양반들에 의해 쓸데없는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세조도 나이 들고 힘이 빠졌다. 병들고 심약해진 그가 고안해 낸 것이 원상제다. 다수의 공신들이 원상이 되어 다음 왕, 예종의 국사를 돕게 한 것이다.
세조는 의리를 내세우며 함께 권력을 찬탈할 때처럼 공신들이 자신의 아들을 도울 줄 알고 죽었겠지만, 결국 세조가 꾀를 낸 새로운 시스템, 원상제는 공신들을 주축으로 한 훈구파 대신들의 권력에 무게를 더하는 꼴이 된다.
원상들의 세상, 즉 조선은 왕정이지만 세조가 죽고난 후부터 신하들의 권력이 더 센 나라가 됐다.
왕의 권력은 약화됐고, 공신들의 담합과 부패, 탐오, 백성들에 대한 가학적 패악은 자심해지고 말았다.
예종, 재위 13개월 만에 족질(발병)로 사망
공신들의 전횡에 불만이 많았던 예종은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분경을 금지시켰고, 공신들이라 하더라도 탐오, 불법을 저지르면 죄를 묻겠다고 선언한다.
예종은 원상(공신)들에게는 불온한 임금이었다. 그런데 왕과 공신들과의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예종은 하찮은 발병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스무 살 왕은 민심이 이반 되어 있음을 알았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했다. 실록을 참고해 저자 박시백은 말한다. "예종은 공신들과 족친들의 전횡을 제어할 배짱과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왕의 사망을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신숙주와 한명회가 서슬 퍼렇던 시절, 조정의 안팎이 그들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던 상황에서 갓 스물이 된 왕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젊은 왕이 급사하고 말았으니…
한명회의 사위, 왕이 되다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가 죽고 그 둘째 아들이 세자가 되어 세조의 뒤를 이었으니 그가 예종이다. 예종이 족질로 사망하자 다음 왕은 누가 되어야 하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원상들 중 한 명인 신숙주는 대왕대비, 정희왕후에게 후사를 결정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어리다는 핑계로 죽은 의경세자의 아들 중에서 후사를 고른 것이다. 그것도 첫째 아들인 월산군이 아니라 둘째인 자을산군을 후사로 결정한다. 총명하고 반듯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자을산군의 부인인 한 씨가 한명회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왕위는 이제 신하들에 의해 결정되는, 이른바 택군의 시대를 맞이하는 한심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정통성에 흠집을 내며 왕좌를 차지했던 세조가 자초한 것으로 봐야한다.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이 왕이 됐다. 그가 국사책에 <경국대전> 반포로 소개되고 있는 왕, 성종이다.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의 섭정은 7년만에 끝이 난다. 그녀는 손주를 위해 깔끔하게 물러났다. 군주 수업을 마치고 나서, 성종은 왕권을 되찾는 작업에 돌입한다.
기득권을 가진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성종은 재야의 서원에 묻혀있던 사림을 대거 등용하게 된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면서 당쟁의 맹아가 싹튼다.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의 뜻을 좇아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 인물은 정몽주의 후예, 야은 길재였다. 길재의 계보는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제자들을, 성종은 홍문관과 사간원의 대간에 기용한다.
폐비 윤씨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 의경세자의 비였던 인수대비, 그리고 예종의 왕비였던 안순왕후, 이렇게 세 명의 여성들은 각각 성종의 할머니, 어머니, 숙모가 되는 집안의 어른들이었다. 폐비 윤씨는 애초에는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온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 윤씨는 처음 접해보는 궁중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도 잘했을 것이고, 성종에게도 최선을 다했을 거 아닌가.
세명의 대비들은 좋게 봤을 것이고 성종 또한 만족했을테니 윤씨는 일개 후궁에서 일약 성종의 정비로 자리를 잡는다.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게 되는데…
왕비가 되자 세 대비들에게 정성을 다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있는 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빤히 바라본다던가, 왕의 얼굴을 할퀸다든가, 밥상을 엎어버린다든가, 윤씨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윤씨는 폐비가 되고 궁궐 밖 사가에서 지낸 지 3년만에 왕과 대신들의 합의로 사사된다.
그런데, 성종은 아내만 12명이었고 자식은 28남매를 두었다. 윤씨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었다. 후궁으로 들어가 성종의 사랑을 받고 정식 왕비가 된다.
그녀는 여느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딸들처럼, 자신의 남편이 밤마다 다른 여성들과 잠자리를 갖는 것을, 법도니 왕도니 그러려니 하며 세련되고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남편은 밤마다 다른 여자랑 잠자리를 하고 셋이나 되는 시어른들은 모두 왕 편만 들었을 게 뻔하니, 안 그래도 힘겨웠을 시집살이가 더욱 괴롭고 짜증스럽지 않았을까?
세자의 모친에게 사약을 내려버린, 세명이나 되는 나이든 여성들과 성종은 지혜롭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다. '성종과 세 여자 어른들에게 사태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에 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