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인종, 명종)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한 꿈을 꾼다. 중종의 장자가 엄연히 세자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뜻밖에도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요절한다. 뒤이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에 즉위하니 그가 명종이다.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사실상 여왕의 권위를 갖게 된 그녀는 동생 윤원로, 윤원형과 함께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소윤 vs 대윤
대윤은 윤임으로 인종의 숙부인데 소윤인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 씨 형제들로부터 인종의 왕권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른바 동궁파와 대군파 사이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인종의 요절로 소윤 측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윤임을 포한함 반대파는 모두 숙청된다.
1545년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정쟁은 조정의 일상이 된다. 중종 때 문정왕후 파의 공작정치가 등장한다.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 씨와 아들 복성군을 제거하기 위해 동궁 작서의 변을 일으킨 것이다. 쥐와 목각 인형으로 세자를 저주한다는 혐의를 씌워 경빈 박 씨와 복성군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소윤은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말하는 것인데, 소윤이 권력을 잡자, 동생인 윤원형은 그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형을 모함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권력을 틀어 쥔 원형은 조강지처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다- 를 버리고, 정난정이란 기녀 출신의 여성과 재혼한다. 이 여성은 문정왕후의 눈에도 들게 된다.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이 왕권을 신하들로부터 되찾아오면서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좋지 않은 말로를 맞는다.
이황 vs 조식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경상도의 좌, 우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한 당대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이황이 서경덕이 시작한 이(理)와 기(氣)에 관한 공부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가 먼저냐 기가 먼저냐 하는 논쟁과 4단 7 정론을 주장했다.
조식은 지식의 실천을 강조한 인물로 주자의 학문을 잘 따르기만 해야 하는 유학뿐 아니라 지행합일을 주장한 양명학을 공부했다.
조식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의 가르침을 체화한 덕에 모두 의병을 일으켜 배움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곽재우와 정인홍이 그들 중 일부다.
후세에 천 원짜리 지폐에 등장한 이황과는 달리 조식은 그냥 역사 속 인물에 그치고 말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의의 실천보다는 권력의 유지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인간들이 정치적 권모술수에는 능한 법이다.
임꺽정
권력욕에 사로잡힌 국가의 리더들은 백성의 안전과 세심한 행정에 관심을 쏟을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덕분에 조선 팔도 모든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급관리들인 아전들 또한 비리와 부패가 자심했다.
당연히 공납과 군역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의 기반을 떠받치고 있던 백성들 중 상당수가 유랑의 길을 선택했다.
그중 의적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 임꺽정이다.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만큼 장사였는데 탐오한 관리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을묘왜변
중종 때 삼포왜란이 일어나 부산의 포구 세 곳이 왜구들에 의해 점령당하며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조정은 별다른 대책 없이 왜놈들을 봐준 탓에 명종 때에는 이들이 전라도 해안을 습격해 을묘왜변을 일으킨다.
이준경, 윤경 형제들이 도순찰사가 되어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괴멸시키지는 못했다. 조선의 장수와 군졸은 이미 이성계가 이끌던 때의 군사가 아니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의 3남인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14대 임금이 된다. 조선 최초의 방계 승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