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중종)
이복형 연산의 폭주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정현왕후의 아들 이역, 반정의 수혜를 입고 잔뜩 위축이 된 채 17세의 나이에 왕이 되니 그가 중종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무려 39년!
중종에 대한 실록의 평은 싸늘하다. 이렇다 할 치적없이 왕위 지키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조광조라는 걸출한 인물을 발탁해 놓고도 시기와 질투 때문에 제거해 버리면서 그는 조선의 성군으로 남을 기회를 잃는다. 고려 공민왕이 승려 신돈을 발탁했으나 그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개혁에 성공하자 질투의 화신으로 변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신돈도 참수되었다.
조광조
혜성과도 같이 나타난 바른 생활 사나이, 조광조! 중종은 공신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잇따라 사망하자 당황한다. 그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다보니 그 공신들의 지시사항을 준수하며 비굴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때 방황하던 중종의 눈에 띈 인물이 있었다. 폐비 신씨과 관련해 인상적인 상소를 올린 문과 급제자, 조광조였다. 그를 발탁해 개혁의 엔진으로 사용한다.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해 과거제를 보완할 수 있는 현량과를 설치해 사림의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할 수 있게 한다.
조광조는 경학, 특히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장(시와 문장)에 치중하는 세태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유학자로서 학문과 실천에 심혈을 기울인다. 바른 자세와 태도, 행동으로 배우고 익힌 학문을 실생활에 실천하는 조광조의 모습은, 많은 유학자들과 사대부, 임금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제도 정비와 소격서 폐지, 공신들에 대한 기득권 제약 등 조광조의 주장이 대신들과 대간들의 동의를 얻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왕은 이상하게도 위기의식을 느낀다. 자신보다 월등한 존재로 부각된 조광조를 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남곤
연산군에도 협조하지 않고 중종반정에도 가담하지 않은 인물이다. 신진세력의 리더로 떠올랐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조광조에 밀려 있었다. 중종은 이런 남곤에게 밀지를 내려 조광조를 제거한다. 옳지 못한 방법이었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남곤, 그는 조광조 제거 이후 영의정까지 지내며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염치와 양심은 있는 인물이었다.
자식들에게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는 이 글들을 모두 태워 없애도록 해라. 죽으면, 비단으로 염습하지 마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않도록 해라.(140쪽)"
정광필
반정 후 정국의 안정을 위해 학문과 인품이 있는 인물, 정광필은 무려 14년 동안 정승을 역힘한다. 조광조가 득세해 무리한 주장, 이를테면 과거제를 대신해 현량과로 인재를 뽑겠다거나 한방에 소격서를 폐지하자는 등의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조광조가 중종과 남곤의 협잡으로 실각할 때에 그는 조광조가 함정에 빠졌다며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김안로
머리 좋고 재주 좋은 인물, 그러나 탐오와 비리의 결정체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광조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공신들(심정, 이행, 심사순, 이항)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안로에 의해 역모혐의가 적용되어 사사된다. 중종은 김안로의 손에 경연, 언론, 외교, 교육, 인사, 검찰, 국방권을 모두 쥐어준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김안로는 중종의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를 견제하려다가 되치기 당해 사약을 받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런 인물이었다.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을 한 껏 띄웠다가 갑자기 사지로 내모는 방식으로 신하를 다루는..... 진정성이라고는 1도 없는 인물이 중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