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선조)
중종의 7남,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선조다. 적자가 아닌 방계 승통으로 왕이 된 케이스. 선조는 두뇌가 명석해 글공부도 잘했고, 당대의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잔머리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보신주의에 이기주의, 파렴치하면서 비양심적인 인물이었다는데, 책을 읽다 보니 과연 그러했다. 쫄보에 무책임하면서 말 바꾸기가 주특기였던 인물이었다.
기축옥사
서인과 동인의 출현으로 당파싸움이 본격화되는 것도 선조의 잔머리에서 출발했다. 다수였던 동인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선조는 기축옥사를 일으킨다.
서인의 수장 격인 정철을 위관으로 등용해 동인 선비들을 일망타진한다. 무려 천여 명에 가까운 선비들이 이 기축옥사로 희생됐는데, 동인의 수장이었던 이발은 자신과 팔순의 모친, 어린 자식들에 일가친척까지 사형을 당하면서 멸문지화 된다. 이발의 본관이었던 광산 이씨의 뿌리가 뽑힐 정도였다.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두고 전북 진안으로 내려가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해 공부도 하고 무예도 닦으며 지역의 유지로 자리를 잡는다. 그는 왜구가 침범했을 때는 전라도 관찰사의 부탁으로 전투를 벌여 무찔렀을 정도로 체계가 잡힌 조직을 이끌던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다.
"천하는 공물인데 주인이 어떻게 정해질 수가 있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반상의 구분이 뚜렷했던 당시로서는 불온해 보일법한 표현이었다. 양반뿐 아니라 평민을 비롯해 승려나 노비, 기생 등 신분의 구별 없이 조직에 수용한 점 또한 당시 조선사회의 기득권층드에게는 이단적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동인 출신 정여립은 역모 혐의를 받아 죽게 된다. 정여립과 만남을 가졌거나 서신을 주고받은 선비와 대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사건이 기축옥사다.
2002년 5월 25일 방송된 역사스페셜에서 정여립 관련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남명 조식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었다. 백성의 경제적 안정, 부국강병, 신분과 관계없는 인재 등용,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한 리더의 축출 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상과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상하 구분이 엄연하던 신분사회였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으로 작성된다. 억울하게 희생된 정여립과 대동계 회원들, 정여립과 교류를 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모두 처형됐다.
정여립의 후손인 동래 정씨와 이발의 후손들인 광산 이씨는 여전히 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실체를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여립과 같은 계열이었던 조식의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한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66주를 통일한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십만의 정예부대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의 200주, 그리고 인도, 아니 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헛꿈을 꾼다.
지금의 야마구치 현의 한 지역이었던 조슈번과 가고시마현의 사쓰마번 등 일본의 서쪽 세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기했던 정한론의 뿌리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 기시 노부스케나 최근 한국과의 무역분쟁을 일으켰던 전 총리, 아베가 바로 조슈번 출신들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 부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침략해 삽시간에 한양까지 쳐들 왔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임진강을 건너면서는 나루를 폐쇄하고 배를 가라앉게 한 후 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하게 한다. 백성들이 뗏목을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조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피신해 명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일신의 평안을 계획했던 선조 일행은 전라좌수사의 수군이 이룬 전공 덕에 한시름 놓게 된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조선의 수군은 일본을 상대로 연전연승하고 있었고, 때문에 일본 육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전라 좌수사는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공인으로서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된 삶을 사느라 출세와는 인연이 없던 인물, 이순신이었다.
경상 우수사는 인사고과에서 물먹는 바람에 전라좌수사에서 경질됐던, 원칙이나 소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 원균이 맡고 있었다. 그는 왜란이 발발하자마자 배와 무기를 바다에 침몰 시킨 후 도망치려고 하다가 부하 장수의 설득으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한다. 전라도 수군을 이끌던 이순신의 첫 해전 지역이 대구의 옥포가 된 배경이다.
원균은 출세하는 방법에는 도가 튼 인물이었던 모양. 수시로 거짓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신을 치켜세웠다. 이 자는 한산도 대첩이 한창이던 때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생각을 하기보다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으로 보내기에 바빴고, 이순신이 이룬 성과를 깎아 내리고 그 전과를 도적질 하기에 바빴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이룬 성과와 의병 대장들의 활약, 그리고 명의 참전으로 물러났던 일본은 5년 뒤 다시 조선을 침공(정유재란)하게 되는데, 이때 원균의 모함과 일본 장수들의 반간계, 선조의 시기와 질투로 이순신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는 처지가 된다.
선조는 이때 대신들에게 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의논하게 한다. 그리고 3도 수군통제사에 원균을 등용한다. 명색이 해군참모총장이었건만, 겁을 집어먹은 원균은 해전에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는다. 결국, 그는 칠천량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다 죽는다.
원균의 무모한 해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경상 우수사 배설은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칠천량에서 이탈해 있었다. 바로 이 12척의 전함이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언급되었고, 일본 전함 300척에 대항해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끈 명량해전의 주역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끝까지 이순신을 폄하하고 의병대장들의 전공을 치하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호송했던 신하들과 패장 원균만을 싸고도는 기이한 행태를 보인다.
전란이 끝나자 자신을 대신해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의 문안도 제대로 받지 않았으며 유성룡의 제안이었던, 의병에 가담해 싸웠던 백성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모두 폐기해 없던 일로 만들었다. 선조는 그런 리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