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광해군)
비운의 군주가 된 광해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친,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도망간다. 대신들의 조언대로 분조(分朝)를 이끌고 적진을 누비는 인물이 세자 이혼, 광해군이다.
난이 진정되고 왜군이 물러나자 선조는 태도를 싹 바꾸고 세자 이혼의 지위, 즉 국본의 자리를 흔드는 역할을 한다. 참 비열하고도 무자비한 왕이자 아비가 아닌가. 선조, 다시 말하지만 양심이 없으면 염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임금님이다. 그 아들이 광해군이었다.
영창대군 & 인목대비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다. 50이 넘어서 17살의 아내를 얻은 것이다. 당시 세자, 광해군의 나이는 26세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 일이, 자신의 아들보다 9살이나 어린 여성과 올린 혼례였다.
난 중에 분조를 이끌던 세자에게 일정 정도의 권력을 주어 내치와 외교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였건만.
설살가상, 그런 새엄마가 아들을 낳는다. 영창대군이다. 선조와 인목왕후는 이혼의 세자 자리를 위태롭게 했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원하게 세자에게 선위를 선언하지 않았다.
이방원이나 그 손자 이유(세조)의 예를 보라. 영창대군만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살려둔 것만으로도 광해군은 하해와 같이 아량이 넓은 인물로 봐줘야 하지 않을까.
중립외교
광해군이 실각한 원인은, 즉위 전 국본으로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웠던 바람에 즉위 후에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 이이첨과 같은 공작과 협잡에 능한 정치인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인목대비를 제거하기 위해 허균과 황당한 밀약을 하게 된 것도 결국 이이첨의 계략에 의한 일이었다.
조선의 주변국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의 상황은, 청의 누루하치가 여진을 통합하면서 명을 압박하고 있었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일본 동부지역 출신 귀족,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다.
명은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상황이었고, 일본은 정권이 바뀌면서 강화를 요구해왔다. 그런데 조선의 집권 대신들의 상황인식은 전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무찔러 주었으니 조선의 대신들은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동법을 주장했던 영의정 이원익 정도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 정책에 호의적이었을 뿐이었다.
인조반정
광해는 외로운 섬이었다. 국제정세는 요동을 치고 있는데 신하들은 친명 사대 외엔 어떤 주장도 귀 기울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부적으로는 이이첨의 세력이 비대해진 것에 대한 대책에 고심하던 광해군은 새로운 역모에 대한 고발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리더에게 방심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으니.
선조의 또 다른 아들,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이 제거하지 않고 살려둔 계모, 인목대비가 반포한 교서에는 인조반정의 명분이 잘 담겨있다.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인간적 도리의 문제다.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가 되는 인목대비를 유폐한 일, 둘째는 창덕궁, 경운궁, 창경궁 등 잦은 궁궐 공사로 백성을 수고롭게 한 일, 셋째는 재조지은을 무시하고 명을 배반하고 청나라와 화친을 꾀한 일이다.
결국,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와 잦은 궁궐 공사라는 것들은 광해군을 폄하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 재조지은이라는 억지 명분을 부르짖은 서인 정권이 저지른 쿠데타가 인조반정이다. 광해를 폐하고 인조를 세운 서인정권의 선택은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