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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Dec 15. 2021

인조, 남루한 영혼의 소유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인조)

광해군을 내쫓고 왕이 된 인조가 내세운 반정의 명분은 중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던 청에 사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언급하며 아버지 나라인 明을 받들어야 한다는 교조적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

정묘호란은 청나라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일대 위기였다. 즉위하자마자 공신에 등록된 인물, 무신 이괄이 일으킨 난으로 인조는 궁궐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패색이 완연한 상황, 강화도에 숨어있던 인조는 청을 조선이 형제국으로 모시기로 하는 맹약식을 거행한다. 이때 이미 쿠데타의 명분은 그저 왕위 찬탈의 핑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임금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한다.

김상헌 vs 최명길 146쪽

9년 뒤 1636년, 12월이 되자 청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청이 내세웠던 침략의 명분은 횡의였다. 명을 높이고 청을 오랭캐로 여기는 조선의 생각을 바꿔주기 위해서라고 보면 되겠다.


다시 강화도로 파천할 생각이었지만, 순식간에 남하한 청군을 피해 인조 일행이 숨어든 곳은 남한산성이었다. 한 달 반 동안 남한산성에서는 어리석은 논쟁만 있었을 뿐이다. 청의 대군에 둘러싸인 채 하는 논의가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다는 것에 대한 논의와 하나 다를 것 없었기 때문이다.


실리와 명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체력, 두 덕목을 확보해 건국된 조선이란 나라는 무능한 집단이 술수와 책략으로 연이어 권력을 쥐게 되면서 나락으로 빠져드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119쪽

특히 한심했던 일, 청 황제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의 맞은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가운데 인조와 대신들이 이른바 망궐례를 행한 것이었다. 청나라에 포위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와중에도 명나라 황제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고 싶었던 서인과 인조의 멘탈리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국, 인조는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바닥에 찧는 의식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난 후, 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아들을 돌아가는 청 황제에게 인질로 딸려 보내고 난 후에야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조는 한달 만에 망궐례도 하고 삼배구고두도 했다. 인조와 서인정권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독살된 소현세자

9년 동안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아는 인물이었다. 명나라가 쇠하고 청이 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리더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낱 오랑캐로 치부했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더니 몽고족들을 통합하고 기어이 명을 꺽고 대륙을 차지한다.


소현세자는 청 태종이 죽자 실권을 장악한 동갑내기 도르곤이 북경을 함락해 중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작은 부족의 오랑캐도 대륙을 통일하는데 조선이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85쪽

소현은 청에 포로로 끌려왔던 백성들을 한 명이라도 구해 조선으로 돌려보내고자 했고, 일신의 안위보다는 조선의 국익을 생각해 목숨을 걸고 청의 실권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표명했으며, 청이 제공한 토지를 개간해 수확한 곡식으로 무역을 해 상당한 수익을 거둘 정도로 실리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도르곤과 북경에 5개월 머무는 동안 아담 샬을 만나 새로운 문물과 서적을 얻기도 했다. 이 서적들이 정조때 실학자인 정약용에게 전해져 수원성 축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다. 청나라에서 9년을 탈없이 견뎠던 세자가 갑자기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사후 장례도 간소하게 처리된다.


왕비 인열왕후의 여동생이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는데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피부색은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두터이 하게 되고 새로운 문물과 사상으로 실리적 태도를 갖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된 데에 시기와 질투, 더 나아가 불만과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장자이자 후계자를 제거하고 말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며느리와 손주들까지 불귀의 객으로 만든다.


서인 정권 & 인조

선조는 기축옥사를 일으켜 다수였던 동인 세력을 축소하는데 서인을 이용했다. 서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인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이로써 다양한 논의는 실종된다.


북벌이나 부국강병, 신분제도의 완화나 대동법의 시행, 그리고 양반이나 사대부의 군역 부담과 같은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개혁이, 임진왜란이라는 홍역을 치르고도 국정의 어젠다로 채택되지 않았다.


광해군을 제거한 것도 오로지 재조지은이라는 명분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인조 정권은 친명반청의 기치를 실천할 수 있는 상황도 만들지 못했다.


선조가 임진왜란을 겪고 맨 처음 한 일이 17살의 처녀한테 새장가를 든 것처럼, 인조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 황제에게 머리를 짓찧으면서 절을 하고 생때같은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면서 울고불고한 후에 궁궐로 돌아와 처음 한 일이 새장가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후궁 조씨의 치맛폭에 쌓여 일신의 평안만 누리다가 볼모 생활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세자를 죽인 것이다. 저자 박시백도 말한다. 인조하는 묘호의 어질 인(仁)자는 어쩌면 후세의 비아냥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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