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효종)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세자로 책봉된 인물은 차남, 봉림대군이다. 사후 관이 몸에 맞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청의 볼모로 있던 대군 시절, 형 소현을 대신해 험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거나 포로로 잡혀와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의 귀국을 돕기 위해 애쓴 왕자였다.
본인의 뜻은 아니었지만 형과 형의 아들을 제치고 즉위한 효종은, 청나라에 복수하고 치욕적 과거를 씻어내는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즉위 후 제일의 목표로 삼는다.
기해독대 후 두 달 뒤 사망한 효종
기해독대, 효종 10년(1659년) 3월 11일 효종이 사관과 승지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과 단둘이 만나 시사를 논한다. 이로부터 두 달이 채 안된 5월 4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퍼진 효종은 침 시술을 받은 후 사망한다.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9년 동안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냈지만 건강하게 잘 살다가 귀국했다. 그런데 송시열과 독대 후 두 달 뒤 종기의 독으로 인해 사망한다.
서인은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옹립한 명분으로 반청을 내세웠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철저한 중립으로 실리를 챙기자는 것이었다.
인조와 서인은 청에 굴복하는 수모를 겪고나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한 청사진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소현세자가 등장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국방, 과학, 신분제 개혁에 대한 의제들을 던졌지만 독살 당했다.
저자 박시백의 해석처럼 효종이 북벌을 외친 이유는 정통성 컴플렉스를 가리기 위한 간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북벌을 위해 군사훈련이나 총포 개량과 같은 노력은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벌을 방해했다. 기해독대는 이런 가운데 효종이 기획한 이벤트였다.
효종 9년, 남인계 대부였던 윤선도가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말을 들어보자.
"신의 지난 번 상소는 네 번, 두번째 상소는 무려 열세번이나 퇴짜를 맞았나이다. 명색이 대부인 신의 상소도 조금만 거스르면 거부되는데 초야에 묻혀 사는 백성의 말이야 오죽하겠사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의 상소가 권신이나 외척을 지적한다면 비록 그 사안에 국가의 안위가 걸려 호흡지간을 다투는 일일지라도 어떻게 구중궁궐에 올라갈 수 있겠나이까?(73쪽)"
왕은 서인세력에 철저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효종은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독대를 통해 서인에게 전권을 줄테니 왕이 추진하는 북벌에 협조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북벌은 불편한 이슈였다. 군사력을 강화하게 되면 왕권이 강화된다.
왕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신하들, 즉 서인들의 기득권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된다. 같은 서인이었던 김육은 대동법의 전국확대를 주장하지만 양송, 즉 송시열과 송준길은 동의하지 않았다. 군주와 백성들의 삶과 안녕에는 눈을 돌리는 신하들, 그들이 서인세력의 실체였던 것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왕을 공부시키는 경연장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심경(心經)>, 즉 마음공부였다. 틈만 나면 송시열은 왕에게 근검절약과 수신(修身)을 주문했다.
대신들과 대간들은 왕의 명령이라도 서인의 강령과 맞지 않으면 출납하지 않을 정도였다. 효종은 그렇게 살다가 죽은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