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고종)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모친이 되는 신정왕후에게 자신의 아들을 익종의 양자로 줄 테니 왕을 시켜달라고 제안한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흥선대원군은 실세가 되고 개혁도 한다.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지우는 호포법을 시행하고, 명나라 황제를 모시던 만동묘와 각 지역에 할거 해 있던 서원을 철폐한다.
오점도 남긴다. 당백전 발행으로 물의를 빚으며 경복궁을 재건한다. 그리고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었다.
안동 김 씨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모습을 되찾고 싶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짝지어 준 민비의 도움을 받은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실각하게 된다.
민비는 숙종의 아내 인현왕후 민 씨의 부친이 되는 민유중의 자손이었다. 안동 김 씨에서 여흥 민 씨로 성만 바뀌었을 뿐, 이들 또한 노론 명가로 자부해마지 않는 집안이었다.
대원군에 대한 박은식의 평가, "대원군은 용맹하고 과감하며 번개처럼 빠르고 변통에 능해... 참으로 정치상 대혁명가라 할 수 있다.(108쪽)"
흥선대원군이 민씨일가보다는 어느 정도 낫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며느리를 노론가에서 선택한 일과 실각했다가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나라를 등에 업고 다시 조정에 등장한 모습을 보건데는 역시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 하다.
민 씨 일가
별기군과 궁궐의 방어를 담당하는 무위영 장어영 위주로 군대가 돌아가다 보니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방치된다. 이들이 임오군란(1882년)을 일으킨다.
이들은 민 씨 일가들의 가옥을 불태웠고 민비를 찾아내 죽이려고 했다. 매관매직과 같이 세도를 거머쥐게 된 민 씨 일가들이 저지른 폐해가 민간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자심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은 일본과 청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빌미를 주었고, 다시 추대되는가 싶던 대원군이 청에 의해 납치되고 숨어 지내던 민비가 궁궐로 돌아오면서 조선은 청과 일본이 각축전을 벌이는 무대로 전락한다. 임오군란은 조선에 불평등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조선의 지배집단, 노론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력은 급격히 쇠락한다. 사회가 건강성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의로운 선비들과 민초들이 봉기해 나라를 지켰다.
그렇지만, 당파 싸움에서 승기를 거머쥔 서인은 노론으로 진화해 나라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를 지킨다.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결정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위를 보장하는 선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백성들의 지지도 왕의 지지도 받지 못한 정변이었으니 삼일천하로 끝나버린다.
20세기를 코앞에 둔 조선의 국정은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알력 다툼으로 흔들리고,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