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망국)
홍범도 장군
작년 여름, 술자리에서 선배 한 명이 느닷없이 물었다. "아니 외국에 묻혔던 사람 유해를 굳이 한국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 술이 확 깼다. 때는 광복 76주년을 기념해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 있던 묘역으로부터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우리나라로 봉환하는 국가 행사가 있고 난 직후였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한 장군을 기리고 국가 정체성을 재정립하자는 의도에 한치의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나는, 뜨악했다. 일본 압제의 그늘에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체를 학살당하고 정신을 유린당했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의식
친일 행적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켰던 시인 서정주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일본 통치가 한 백 년은 갈 줄 알았지. 누가 알았나 이렇게 빨리 한국이 독립하게 될 줄을!" 기자인지 동료 문인인지 어떤 이가 그에게 친일행적에 대해 묻자 했던 말이라고 한다.
뉘우치고 회개해야 할 일을 저지른 사람의 반응이 '갑작스러운 독립에 실망했다'라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읽고 감명받았던 사람으로서 대단히 실망스러운 에피소드다. 우리가 떠받들었던 많은 지식인들의 실상이 그러했다.
많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가 백 년 이백 년 지속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런 시절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도대체 어떻게 신념을 굳게 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역사의식
고종이나 민비, 그리고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와 청나라와 일본을 번갈아가며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흥선대원군, 그리고 온건 개화파 등 조선말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이웃 나라인 청과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혁신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상황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던 왕실과 노론 당파는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같으면 어떤 변화도 악(惡)으로 규정짓고 처벌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동학혁명(1894년)을 대하는 고종과 민비의 태도를 보면 이들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변한 시대를 담아낼 수 없는 제도 위에 군림하면서 아무것도 포기하기 싫었던 그들은 우리 백성들을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으로 학살해 버린다.
동학농민혁명군의 2차 봉기 때 농민만 20만 명이 넘게 희생당한다. 학살의 현장, 공주 우금치에 가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당시의 비명과 아우성이 들린다고 한다.
동학혁명을 진압하고 났지만 일본 군대는 해산하지도 돌아가지도 않고 조선에 주둔하며 내정간섭을 한다. 고종과 민비는 영국과 프랑스를 동원해 삼국간섭(1895년)을 해낸 러시아에 눈을 돌린다.
고종과 민비의 '인아 거일(引俄拒日)' 작전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조선을 자신들의 소유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민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그 좋은 머리로 자국 국민들의 힘, 즉 동학농민혁명의 에너지를 믿고 의지해 개혁과 개방, 부국강병에 전심전력을 다했더라면 천수도 누리고 우리나라 최초 여성 영웅(heroin)으로도 대접받았을 위인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후 진행된 아관파천은 멕아리없이 흐지부지 된다. 러시아는 조선보다는 만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1898년)가 일반 백성들의 호응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게 되자 민주주의나 공화제와 같은 새로운 제도의 맹아가 보였다. 이때는 일본과 러시아, 두 세력 간 균형이 팽팽했기 때문에 조선은 외세의 진공상태였다.
만약에 고종과 지배층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제도개혁과 부국강병에 올인했더라면 1905년의 을사늑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비밀리에 관변단체인 황국협회로 맞불을 놓아 독립협회의 가치를 훼손한다.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의 대표주자, 이완용은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자손(사손)이고, 당파는 노론 계열이라고 한다. 왕족 출신에다가 노론 당파 사람이다 보니 고종 알기를 우습게 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완용은 머리도 좋고 세련된 수완도 지닌 인물이었다. 이토가 제안한 을사조약의 문구를 몇 개 고치면서 마지막 사인을 망설이는 고종을 설득한 사람이 이완용이다. 공무로 미국에도 다녀온 친미 파였고, 아관파천 때는 러시아 쪽에도 기웃거렸다.
국가와 왕과 백성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자신의 삶이 영화로우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국가 요직의 핵심 인사였던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철도부설권과 금광이나 철광석 채굴권을 여러 나라에 넘겨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사람들도 이완용과 같은 국가 요직의 인사들이었다.
봉오동 전투(1920년)를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유명했던 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쟁을 이끌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 그러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그저 우연히 된 줄 아는 사람들은 "왜 이미 죽은 사람을 모셔온다고 난리야?"라고 묻는다.
역사교육이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의 나열을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심각한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 중 하나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