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5가지(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개그맨 홍기훈을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줬던 캐릭터, 덩달이! 벌써 30년 다 되어가는 옛날 얘기다.
덩달이가 학교 숙제로 '불안감'이란 단어를 넣어서 글짓기를 해야 하는 상황, 방에 앉아 한참 고민하고 있던 덩달이 옆에서 할머니가 빨래를 개고 있었다.
브래지어를 들추어 위아래로 훑어보던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우리 에미 불안감?"
그 후로 나는 '불안'을 생각하면 이 개그가 자동 연상된다. 불안감이 엄습할 때면 어이없게도 이 개그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불안감은 눈 녹듯 사라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에피소드가 혹시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이 개그가 당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것은, 개그맨이나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이라는 정서적 반응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뇌 속의 뉴런이 전기자극을 일으켜 화학작용을 유발해 호르몬인, 아드렌 날린을 분비하게 만드는 과정을 일컫는 표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불안의 원인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일으키는 다섯 가지 요인을 소개한다. 그것은 사랑 결핍, 속물근성, 능력주의, 기대, 불확실성이다.
첫째, 사랑 결핍, 사람은 태어나서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귀엽고 깜찍해서 바라만 보아도 사랑스럽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러한 맹목적 사랑을 갈구하는 동물이 인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사랑과 관심이 멈추거나 줄어들게 되면 우리는 불안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라는 심리학자의 책, <심리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를 통해,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을 당하느니 차라리 채찍을 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편을 선택하게 된다는 극단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둘째, 속물근성, "'속물근성 snobbery'이란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작위가 없는 학생들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임말이 's. 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 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중략.... 이것이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28쪽)"
인격과는 상관없이 지위의 고하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사람의 정서가 안정되어 있을 리가 없다. 속물근성이 불안의 원천이 되는 이유다.
그래서 저자는 속물들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치품을 구하기 위해 열을 내는데, 따라서 사치품의 역사가 탐욕의 서사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셋째, 기대, 20세기에 접어들자 인류는 100년 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해진다. 부, 식량, 과학지식, 소비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증가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생한다. 훨씬 더 나은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확신과는 달리 변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듯이 우리의 감정선 너머로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 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55쪽)"
넷째, 능력주의, 이 챕터에서는 저자가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세 가지'와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전자에 관해서는 마르크스가 소환된다.
"지배계급들이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91쪽)"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쓸모가 많다. 지위가 낮다고 해서 도덕성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부를 얻었기 때문에 죄가 많고 부패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꾸준히 영향력을 늘여가면서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되었다.(93쪽)" 즉, 기득권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욱 쓸모가 있고, 도덕적 지위도 더 높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논리를 만들어 사회 곳곳에 교육의 현장에 퍼뜨렸다.
능력주의가 팽배하는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폐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모든 수확물을 가져가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모자란 사람도 항상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논리를 강화한 학자는 영국의 사회 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다. 그는 "<사회 통계학 Social Statics>(1851)에서 생물학적 원리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10쪽)"
다섯 번째 불안의 원인으로는 불확실성을 소개한다. "1800년에는 미국 노동력 가운데 20퍼센트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었다. 1900년에는 그 수치가 50퍼센트로 늘었다. 2000년에는 90퍼센트가 되었다.(122쪽)"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언제든 지위가 박탈될 수 있다는 불안에 노출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마르크스가 임금을 규정하는 말로 노동자들의 불안을 최고조로 만든다. "피고용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굴러가게 하기 위해 치는 기름과 같다. 노동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132쪽)"
30여 년 전 '덩달이 시리즈'로 유명세를 얻은 개그맨, 홍기훈은 무슨 이유에선지 10여 년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라졌다. 부와 명예를 얻게 되면서 혹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에 도취됐던 것은 아닐까?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을 위해 개선식을 할 때, 백마가 이끄는 마차 위에서 연도의 환영인파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장수 뒤에는 항상 노예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장수의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다. 환희와 영광 속에서도 문득 스칠 수도 있는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안성마춤의 장치였을 듯 하다.
아마도 30여 년 전 젊은 개그맨에게는 로마시대 개선장군을 위한 노예처럼 자신을 닦아세워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