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골프, 함부로 덤비면 망한다!!!

by 정태산이높다하되

세종대왕은 격구를 즐겼다고 한다. 말을 탄 채로 막대기를 휘둘러서 공을 치는 방식이 아닌, 걸으면서 스틱으로 공을 쳐서 동그랗게 파인 홈에 집어넣는 다소 정적인 방식이었다.


학문과 과학기술, 국방,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심을 갖고 정렬을 쏟았던, 그래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문가였던 팔방미인 리더, 세종은 온천은 종종 다녔으나 아쉽게도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권 74쪽

그가 유일하게 한 운동이 격구였다. 박시백은 세종이 즐겼던 격구를 자신의 만화책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마치 현대의 골프처럼 보인다.


잔디가 필요 없고 흙바닥에 선을 긋고 가죽으로 만든 동그란 공을 막대기로 쳐서 조그맣게 만든 구멍에 넣는 방식이다. 작은 공을 가지고 하는 놀이는 동서고금에 여러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작은 공을 막대기로 쳐서 작은 홀에 넣는 게임의 최첨단 형태로 자리잡은 골프, 재미는 있는데, 심하게 어렵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골프가 아이러니와 역설이라는 수식이 필요한 스포츠의 표본이 된 이유다.


드디어 싱글 플레이를 해보다

어제 플레이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쉽게 풀렸다. 그 어려운 산의 계곡 코스(Mount Osmond Golf Course)에서 더블보기가 한차례도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단 드라이버 샷이 무난했다.첫 티샷이 잘 풀리면서 나머지 샷들이 잘 따라줬다. 퍼팅도 두 번 이상한 경우는 서너 홀 밖에 안될 정도로 안정된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유일하게 더블보기가 없었던 플레이였다

특히, 드라이버 샷에서 세 번 실패가 있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페어웨이로 레이업 했고 적절한 숏게임으로 파 par, 또는 보기 bogey로 막으면서 더블보기를 피한 것이 주효했다.


버디 birdie가 없었기 때문에 플레이가 드라마틱하지는 않았지만, 더블보기도 없었기 때문에 기복 없는 플레이가 가능했다.


오만과 편견의 폐해

몇 주 전, 클럽 대회에서 1등을 한 후 드라이버 샷을 뛰어나게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이버 거리를 20야드 더 보낼 수 있다면 싱글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프로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심과 자만은 부지불식 간에 정신에 스며든다. 자각할 때쯤엔 이미 후회의 수순을 밟고 있게 되니 말이다.


새로운 타법을 연구하고 스윙 아크를 크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프로 샾에서 테스트 용으로 비치해 둔 신형 드라이버를 사용해 보았다. 채가 나에게 맞는지 테스트한 것이 아니라 거리가 더 나가는지 확인하고자 한 행위였으니 그 테스트가 효율적이었을 리 없다.


몸통을 과하게 비틀자 확실히 비거리가 늘었다. 그런데 방향 편차의 정도까지 과한 것이 문제였다. 불안해졌다. 거리가 조금 더 나가긴 했지만 구질과 방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맘에 드는 샷이 나오지 않았고, 샷 전후의 루틴도 망가졌다.


보름 동안 고생을 하고 나서야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하고 쉬운 스윙을 하면 되는 것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기존의 드라이버 클럽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평균 regular 정도로 낭창거리는 샤프트도 나 같은 중년의 아마추어에게는 적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몇 주 전 스윙도 나쁘지 않았었다. 거리도 200미터 남짓 됐으니 어지간한 홀에서 두 번째 샷으로 그린을 노릴 수 있었다. 그린을 놓친 경우에는 어프로치를 하면 됐다. 52도, 56도, 60도, 어프로치를 위해 이렇게 세 개나 되는 웨지들이 백 속에 담겨있지 않은가.


골프 연습과정은, 어쩌면 베넷가(家)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가 자존감과 인내심을 포기하지 않고도 명문가이자 부호의 후계자, 다아시를 남편으로 맞게 되는 과정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애면글면 하면 떠나가고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면 다가오는 연인 간 밀당의 생리가 골프공과 플레이어 간 관계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유지해야 올바른 접촉 또는 스파크(?)가 일어나고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순차적으로 쌍방의 관계에 적용된다.


자신의 신념과 삶을 대하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은 두 남녀는 결혼으로, 혹독한 실패의 과정을 극복한 냉정한 골퍼는 싱글로 골인한다.


새로운 경험

어제의 게임을 다시 한번 반추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는데도 묘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차분하게 플레이에 집중하자 골프가 쉽게 느껴졌다.


18홀 동안 9개 오버에 그쳤으니 그간 마운트 오스몬드 클럽에서 플레이 한 중에 가장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세종대왕은 국정을 운영하며 잠깐씩 시간을 내서 격구를 하거나 온천을 다녀왔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들과 신하들이 동반자였다.


대선후보 중 한 인사도 방송에서 말했다. "업무 중엔 일을 하고 그 앞 뒤로는 사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라고. 걱정과 근심으로 얻은 긴장은 그때그때 풀어주어야 하는 것은 알고보니 고금의 진리였다.

나의 호주 공식 핸디(Golf Australia Handicap), 14.2!!!



근 10년 만에 바이러스 덕(?)에 업무도 보고 가족과 시간도 보내며, 취미생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 충전이 어떤 새로운 일을 창조해내는 발판이 될지 기대하면서.


하루 지난 오늘 오전에 확인해 보니 나의 호주 공식 핸디는 14로 줄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