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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Mar 16. 2022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 3장 분노를 떨쳐내라; 발명품: 공감발생기

3장에서는 성경 이야기 중 <욥기>가 소환된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악을 멀리한 욥이라는 사내의 이야기다.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하나님의 조치에도 인내와 복종으로 일관한 욥은 잃은 것의 두 배 이상으로 보상받는다. '의로운 영혼은 결국 복을 받는구나.'라는 믿음이 곧 정의다. "우리는 2단계 과정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먼저 삶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고, 이어서 굳건한 믿음 덕에 보상받는다.(104)"


인간은 '정의justice'를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정의가 없는 마을과 있는 마을에서 각각 벌어질 일들을 상상해보자.


정의가 없는 마을

누군가가 사기꾼이나 힘이 센자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아 손해를 봤다고 치자.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그런데 손해를 당한 개인은 힘이 약하고 머리도 좋지 않다. 억울해도 방법이 없다. 이렇게 되면 주변의 힘센 자에게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힘센 자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고 응징과 보복이 반복되면서 마을의 거리는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정의가 있는 마을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힘 센자가 약한 자를 괴롭힌다고 하자. 마을의 공동체는 협력을 통해 사기꾼을 처벌한다. 힘의 원천이 공동체니까 힘이 강한 개인이 마음대로 타인을 괴롭힐 수 없다. 신뢰가 쌓이고 결속이 강화된다. 방어나 공격을 위해 힘을 기르거나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갖가지 재능, 즉 요리하기, 곡식 기르기, 공예, 또는 이야기 꾸며내기, 노래와 춤 등으로 마을은 다양성을 확보해 풍요롭게 된다.


"정의는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과 다양성에 더 좋다.(109)"


용서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 유다왕국을 정복하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추방했다. 집이 무너지고 자식들이 죽고 건강이 악화됐다. 50년 동안 망명생활을 견딘 유대인들은 기원전 597년 고향인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그들이 바빌론 침략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억울하게 죽은 히브리 영아 수만큼 바빌론의 아이를 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침략으로 훼손된 비폭력적 삶을 되찾으려면, 뭔가 다른 것으로 정의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 시인은 용서 테크놀로지를 고안하여 욥이라는 한 이교도의 이야기에 적용하면서 화평을 가미한 공정성을 이뤄냈다.(106)"


공감

공감은 용서를 위해 선행되는 감정적 균형추다. 지나친 정의는 갈등과 분열, 공포와 증오 같은 부정적 감정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이 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오류를 범한 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용서할 수는 없다. 실수나 잘못을 범한 자에게 공감을 할 수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공감은 대뇌 피질의 '관점 수용 네트워크'라는 최신 신경 회로에 의해 작동된다. 이 네트워크는 가해자의 관점에서 잘못을 상상한 다음, 정상 참작 요인을 찾는다. 그러면 거의 언제나 그런 요인이 존재한다. 가해자가 무지하거나 자포자기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실수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가해자가 태도를 바꿔서 바르게 살겠다는 의지가 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111)"


사과 & 회한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6세기 말경 고안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폴로지아apologia'는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조의 방어를 의미했다. 이것이 좀 더 구체적이고 설득적으로 현대의 사과로 구현된다. 그리고 사과는 혁신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회한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해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외친다. "으아악! 으아악! 사실이구나! 내가 정녕 불경스러운 아들이구나!" 분명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러나, "비명 섞인 외침(회한)은 공식 사과 못지 않게 효과적이다. 아니, 적어도 신경회로와 관련해선 더 효과적이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즉흥적 외침은 오이디푸스가 실시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보여준다.(117)"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분노에서 비롯된 복수와 응징을 실행한다면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용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용서는 공감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공감은 사과를 통해서 실현된다. 사과의 다른 형태는 회한이다. <욥기>와 <오이디푸스>가 세대를 이어 반복해서 읽히고 또 읽히는 이유는 정의에서 시작해 회한으로 종결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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