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이름(3)
용서 그리고 죽음(실제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아버지 떠나던 날.
아버지가 저 뜨거운 곳에서 타고 계신다.
나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의 깊이만큼
미움과 원망도 컸기에 나는 그것으로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
20년 전 우리를 버리고 떠났지만 나는 아니 우리가 그의 마지막을 거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예를 다했다 생각할 것이다.
동생들과 엄마는 후회의 통곡을 한단다.
나보고 그러지 말란다.
이것 또한 가식 아닌가 20년을 버린 사람이다. 눈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게 한 인간이 세상을 든진 것만으로도 모든 죄가 그의 무책임이 용서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다른 소리가 그래선 안 된 다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특히 아버지의 죽음 앞에 아무렇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이유를 몰랐다.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이유를...
전역 후 크게 사업을 하셨다가 사기를 당해 폭망 하셨다는 얘기만 들었고 나는 고3, 동생들은 고1, 6학년 누구보다 아버지의 손길과 정성이 절실했던 때 우리 곁에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
엄마와 행방불명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 하면서도 간간히 들리는 소식에 살아계시니 가만두라는 엄마 뜻에 따라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 우리의 연락도 받으시지 않고 연락도 없으시던 아버지 그냥 건강하면 됐다는 엄마.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다. 잠시 내가 동생들이 결혼할 때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식장에서 한 자리를 빛내주시기만 했을 뿐 예식이 끝나면 마치 자기 자리를 찾아가듯 그리고는 또 사라지셨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돌아가시기 1년 반 전 즈음 코로나가 기성대던 어느 날 갑자기 보자 하셔서 나갔더니 낯선 여인과 함께 아버지는 서 있으셨다. 말을 꺼내시기도 전에 직감했고 배신감에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원망했고 이어 하늘을 원망했다. 그 여인과 아버지의 시간이 우리의 아비 없던 20년 세월 내내였을지 단 몇 년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를 돌보지 않은 무책임함으로 어린 동생들은 모두 생계를 위해 일찍 커야 했다. 막내는 잘 다니던 고등학교마저 자퇴했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동생은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꿈을 포기한 체 주야로 일했다. 나는 군에 입대해야 했고 그렇게 엄마를 돌보며 우리 넷은 아버지 없이 그 긴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간암 말기란다. 이어 몇 개월 뒤 폐암, 직장암까지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단다. 그리고는 많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한다. 끝까지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사람. 이제 와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쩌라고 세월의 시간만큼 다시 보면 용서하고 다시 함께할 수 있다 생각했는 데 이제 와서 어쩌라고..,
그럼에도 2021.10월의 마지막 끝자락 어느 날 새벽 4시 즈음 걸려온 전화에 황급히 내달려 병실에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계셨고 충분히 울었고 충분히 미안했다 그리웠다 쓰다듬고 안아드렸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동생들과 엄마와 아버지와 함께하고 그러고도 한 달 반을 더 견디시다 우리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또 그렇게 하늘로 가셨다. 이미 인사는 했더라도 그렇게 또 홀로 가시면 안 됐다. 사람의 죽음이 일생 중 한 번일 텐데 그렇게 혼자..... 또...... 분명 임종실로 잠시 옮기셨어도 다시 일반실로 갈 만큼 반복됐던 시간만큼 가족들이 올 때까지 버티셔야 했다. 그렇게 my way를 가셨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항상 말씀하시던 고집, 자존심으로 버티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고 가족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그렇게... 그래서 깊이 원망해본다. 그 원망으로 이 슬픔과 맞바꾸려 한다....